재중 동포 3세 장률(張律·58) 감독의 삶은 '경계인'이라는 한 단어로 요약된다. 중국 옌볜대에서 중문학을 가르치고 소설을 쓰다가 마흔 무렵에 돌연 영화감독으로 데뷔했다. 2012년부터는 연세대에서 영화를 가르치고 찍는다. 문학에서 영화로, 중국에서 한국으로 자유롭게 경계를 넘나드는 그가 감독 데뷔 20년을 맞아 12번째 장편 '후쿠오카(福岡)'를 내놓았다. 배우 윤제문·박소담이 본명으로 출연해 일본 여행을 떠나는 '로드 무비' 형식이다. 이들이 후쿠오카의 선술집에서 술집 사장 역의 권해효를 만나면서 이야기가 진행된다.

감독 데뷔 20년을 맞은 재중동포 3세 장률 감독. 그는 영화에서 윤동주의 시(詩)를 즐겨 쓴다. "그의 시를 읽고 있으면 제가 성장한 공간이 그대로 나오는 것만 같다"는 이유에서다.

'군산: 거위를 노래하다'(2018)와 '경주'(2014), '두만강'(2011)까지 유독 그의 영화에는 지명이 많이 등장했다. 27일 영화 개봉을 앞둔 인터뷰에서 그는 "다른 감독들은 스토리나 그림, 인물에서 출발하지만 제게는 언제나 공간이 출발점이었다"고 했다. "때로는 사람보다 공간이 더 많은 걸 담고 있어요. 그렇기에 현지 온도와 습도, 냄새에서 더 많은 아이디어가 떠오르죠."

이번 영화도 10여 년 전부터 후쿠오카 국제영화제를 꾸준하게 방문해서 틈틈이 쌓아놓은 아이디어의 결과물이다. 그는 "도쿄가 전형적인 일본의 대도시라면, 후쿠오카는 여유롭고 개방적이면서도 동네 골목길의 정서도 간직하고 있어서 일본답지 않은 매력이 살아 있는 도시"라고 말했다. "그래선지 후쿠오카에서는 술을 마시다가 유난히 옆자리 손님과 자주 합석을 해요. 서울에서도 힘든 일인데, 하하!"

그가 후쿠오카를 택한 또 하나의 이유가 있다. 시인 윤동주(1917~1945)가 숨을 거둔 장소가 후쿠오카 형무소다. 간도에서 태어나 서울에서 공부하고 일본 유학을 떠났다가 체포되어 요절한 시인의 궤적은 장 감독에게도 적잖은 영향을 미쳤다. "저도 거기서 자랐기 때문인지, 윤동주의 시를 읽고 있으면 제가 성장했던 공간이 자연스럽게 떠올라요."

이번 영화에도 윤동주의 '자화상'과 '사랑의 전당'이 나온다. 권해효의 선술집에 걸려 있는 시가 '자화상'이고, 극 중 권해효와 윤제문이 청춘 시절에 함께 사랑했던 여인의 이름이 '사랑의 전당'에 나오는 '순이'다. 장 감독은 "제가 자란 고향에서는 가장 많이 쓰는 이름이다. 그래서 저 역시 순이라는 말을 들으면 아름다운 조선 여인이 연상된다"고 했다.

2001년 단편 '11세'로 데뷔해서 올해로 감독 생활 20년째. 초기작이 치열한 사실주의에 충실했다면, 언젠가부터 그의 영화에도 판타지적 요소가 가미되고 느긋하고 여유로운 정서가 감돌기 시작했다. 장 감독은 변화의 계기가 된 해로 한국에 정착한 2012년을 꼽았다. "이전에는 인간적 교류 범위도 넓었다면, 서울에 온 뒤에는 동료 영화인·문인·학생 외에는 고립되어 지내는 시간이 늘었어요. 한결 부드러워지고 상상이 늘어난 것도 이 무렵이죠. 나이를 먹으면서 분노가 줄어든 것도 사실이고(웃음)."

차기작으로는 중국 배우들을 캐스팅해서 베이징 등을 배경으로 '유천'을 작업 중이다. 지난 1월 촬영을 끝냈지만, 코로나 바이러스 여파로 후반 작업이 연기됐다. 그는 "색 보정은 베이징, 사운드 작업은 대만에서 하는데 저는 이렇게 서울에 있다 보니 자꾸 늦어진다"고 했다. 영화인으로서 지향점을 묻는 마지막 질문에 그는 "성실한 감독이 되는 것"이라고 답했다. 20년간 12편의 장편을 쏟아낸 감독치고는 너무 간결한 답변이었다. 성실의 구체적 의미를 묻자 그는 또다시 짧게 "스스로에게 부끄럽지 않은 것"이라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