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마 위의 시인' 김옥종이 오랜만에 글러브를 꼈다. 쌈닭 같은 표정이다. "제 정체성은 요리사예요. 시인은 나중이죠. 칼을 잡은 세월이 어느덧 23년입니다. 저녁에는 식당에서 저도 손님들과 술 한잔하고 후식처럼 시를 낭송해드리곤 해요."

이 사내는 한때 주먹 세계에 몸담았다. 악수하는데 손이 크고 투박했다. 고교 1학년 때부터 전남 목포 어느 조직에서 일한 그는 스물한 살에 그 바닥을 떠났다. 킥복싱 체육관을 운영하며 직업 싸움꾼으로 살았고 ‘한국 최초의 K-1 격투기 선수’라는 기록도 남겼다. 그 손으로 김옥종(51)은 요리를 한다. 음식을 만들며 시심을 받으면 이렇게 시를 짓는다.

"내 연인의 굽은 등을/ 젓가락으로 보듬었더니/ 바다는 냉골이었으나/ 물 밑은 얼마나 뜨거웠던지/ 그만,/ 화상을 입고 말았다네"(김옥종 시 '고등어 구이')

이 요리사가 지난 5월 펴낸 첫 시집 '민어의 노래'(휴먼앤북스)는 두 달도 안 돼 3쇄를 찍었다. 제법 알려진 시인도 1쇄 1000부를 다 판매하기 어려운 시대라서 눈길을 붙잡았다. '명태 대그빡 전' '꼬막' '낙지볶음' '갑오징어 회' '문어' '더덕무침'…. 목차만 보면 이것은 시집이 아니다. 끝없이 밀려오는 코스 요리의 파도다. 시를 읽는데 침샘이 반응했다.

지난달 17일 오후 광주광역시 북구에 있는 식당 '지도로'. 메뉴판 아래엔 '드시면 기절. 기절 안 하면 기절시켜 드려요(주인백)'라고 적혀 있었다. 맛이 없다고 하면 강펀치를 먹여 기절시킨다는 뜻일까? 점심 백반(6000원) 장사를 마친 김옥종이 맥주잔에 시커먼 물을 가득 담아 왔다. 고향인 신안군 지도(智島)에서 재배한 양파로 즙을 냈다고 했다. "시집이 좀 팔렸어요. 도마 위에서 재료 손질하고 칼을 대면서 쓴 시들이 특이했는갑죠. 어느 문학제에 갔더니 사회자가 '3쇄 찍은 시인이 왔다'고 소개했어요(웃음)."

큰 체구에 무뚝뚝한 표정이었는데 웃을 땐 어린아이다. '도마 위의 시인'으로 불리는 그는 "식재료를 관찰하거나 요리를 하다 한 문장이라도 떠오르면 곧장 메모하고 궁글려 시를 짓는다"며 "독자에게 들은 말 중에 '시가 맛있네요'보다 더한 상찬은 없다"고 했다.

"내 주먹이 제일인 줄 알고 살다 격투기에서 KO패를 당하곤 그 길로 은퇴했어요. 자신감 잃고 헤매던 저를 구원해준 게 요리예요. '그동안 사람을 많이 엎어뜨리고 자빠뜨려 봤으니 이제부턴 살리는 일을 하자.' 넘어지고 나서 생각이 그렇게 바뀐 겁니다. 음식은 남에게 따뜻한 위로를 주잖아요. 제가 쓰는 시도 그랬으면 좋겠어요."

라운드1: 주먹 세계

김옥종은 요리하면서 쓴 시를 페이스북에 올리곤 하다 2015년 계간지 '시와 경계'에서 신인상을 받아 등단했다. 행동대장, 격투기 선수, 요리사, 시인…. 파란만장한 인생이다. 양파즙은 알싸하고 달큼했다.

―5월 5일 어린이날에 시집이 나왔더군요.

"제가 쓴 시를 활자로 받아본 거잖아요. 책이 가진 물성 때문인지 기분이 엄청 업(up)되더라고요."

―젊어서 어머니 속깨나 썩였지요?

"문제아였으니까요. 어머니는 일하느라 부재 중이곤 했어요. 그 미안함 때문인지 제가 엇나갈 때 뭐라 하지는 않으셨어요. 이 시집을 1번으로 안겨드렸는데 아무 말씀도 안 하셔요. 속으론 자랑스럽겠죠. 제가 가진 한식의 바탕, 손맛은 다 어머니 거예요. 지난 20년을 식당에서 어머니랑 동업했는데 평소에도 '잘했다' '못했다' 말이 없어요(웃음)."

―손이 꽤 크더군요.

"105㎏까지 나갈 땐 솥뚜껑 같았지요. 제가 또 팔이 길어요. 싸울 땐 리치가 1㎝라도 긴 사람이 유리해요. 샌드백 안 친 지 오래고 요리에만 손을 쓰니까 크기가 줄었어요. 부드러워지기도 했고."

―고등학생 때 '소년 주먹'으로 소문이 자자했다면서요.

"힘이 세고 싸움을 잘해 조직에 스카우트됐고 행동대장을 맡았어요. 1번으로 치고 나가는 역할입니다. 맨손 싸움은 한 대만 잘못 맞아부러도 가버려요. 링 위의 싸움과 비교하면 규칙이 없고 더 살벌한 세계죠. 목포에서 행동대장을 할 땐 저를 거시기해분 사람이 없어요."

―방금 '거시기'라고 했나요.

"져본 적이 없다는 뜻입니다. 그때까지는 저보다 강한 상대를 못 만나본 거예요. 어릴 적에는 협객을 꿈꿨는데, 세상에 훌륭한 깡패가 어디 있습니까."

―주먹 생활을 청산하기 어려웠을 텐데요.

"교도소에 한 번 들어갔다 왔습니다. 두부를 한 입 베어 먹고 던져부렀지요. 그런데 6개월 만에 본 여자친구가 '깡패××랑은 더 이상 안 만나겠다' 선언한 겁니다. 보스한테 '이 생활 그만하겠다'며 이유를 말했더니 한참을 웃었어요. 얼척이 없었겠죠. 제가 다니던 전문대학에 동생들이 구름처럼 몰려와 '형님, 식사하셨습니까?' 해서 피곤했지만 돌아가지 않았어요."

―1995년 일본에서 열린 K-1 격투기 대회에 한국인 최초로 참가했는데 1회 KO패를 당했더군요. 규칙이 있는 싸움엔 약했던 건가요?

"으하하하하. 킥복싱으로 24전 24승을 거둘 때였어요. 그날은 1만명 넘게 수용하는 경기장이라 긴장을 많이 했는데 결국 실력이 없어서 진 거죠. 상대는 일본 가라테 선수였고 팔꿈치 치기에 당했어요. 평생 처음 KO당해 링에 드러누웠는데 내가 KO시킬 때하고 쾌감이 똑같았습니다."

―기분이 좋았다고요?

"내가 KO시킬 때 그 묵직한 것하고 내가 그 묵직한 것에 당했을 때 느낌이 비슷했어요. 패배의 쓴맛을 처음 본 겁니다. (세상의 나머지 반쪽까지 안 것 같은 기분이었는지 묻자) 무술 하는 사람에겐 늘 '이겨야 한다'는 강박이 있어요. 첫 KO를 당하고 그 짐을 내려놓게 됐습니다. 힘이 어마무시했는데 지고 나서부터 없어져부렀어요(웃음). 물론 처음엔 수치스러웠죠."

"처녀 시집가게 해주세요. 시가 맛없으면 환불해 드려요"라고 적혀 있다. 김옥종 시인은 첫 시집 '민어의 노래'를 이렇게 식당 안에 진열하고 판매한다. 식사 후 시집을 사고 사인을 받아가는 손님이 많다.

라운드2: 요리가 나를 구원했다

김옥종은 파이트머니를 500만원이나 받았지만 바로 은퇴했다. 체육관도 접었다. '승부에 진 놈'이라는 굴욕감 때문에 한동안 방황했다. 바다낚시를 갔다 빈손으로 돌아온 날이 많았다. 그는 "포기할 줄 아는 마음, 겸손과 너그러움을 바다에서 배웠다"고 했다. 그러던 어느 날 인생의 항로가 달라졌다.

―그 전환점을 좀 설명해주신다면.

"어머니가 선술집을 하셨는데 손님이 광어 한 마리를 가져와서 제가 회를 떠봤어요. 워매, 내가 소질 있네! 그렇게 해서 가게에서 일을 거들며 요리에 조금씩 눈을 뜬 겁니다. '이제 사람 쓰러뜨리는 일은 안 할란다. 살리는 일을 해보자'고 마음먹었지요."

―링에서 내려와 주방으로 직행한 셈인데 완전히 다른 세계 아닌가요.

"지금은 제가 시집 '민어의 노래'로 유명해졌지만 사실 독립해 민어 전문점을 냈다가 쫄딱 망하고 은행 빚을 졌어요. 새우 토마토 절임, 낫토아욱무침 병어회 등 지금 제가 하는 요리는 대부분 창작이에요. 실험하고 실패하면서 만들어간 거예요. 다른 자격증은 시시해서 안 땄고 복어 조리사 자격증 시험만 네 번 떨어지고 다섯 번째 붙었습니다."

―메뉴판에 '내 맘대로 해줄게'는 뭡니까.

"저녁은 다섯 테이블만 받아요. 몇 명이 몇 시에 오는지만 알려주면 제가 장을 보고 요리를 합니다. 손님들은 첫 요리(토마토 절임)와 마지막 요리(간국) 말고는 뭘 드시게 될지 몰라요. 물론 원하는 요리가 있거나 재료를 가져오면 해드리고요. 오후 4시까지 예약이 안 들어오면 문 닫고 술 마시러 갑니다."

―아침은 어떻게 시작하나요.

"백반집은 새벽부터 죽을 똥 살 똥 혼을 빼야 점심에 밥상을 낼 수 있습니다. 5시 반에 일어나 시장에 가요. 빠른 걸음으로 한 바퀴 돌면서 어느 집 물건이 좋은지 훑어요. 양념은 날마다 돌확(돌로 만든 작은 절구)에 갈아서 만듭니다. 믹서기에 돌리면 맛이 변형되거든요. 점심에 얼추 구첩반상을 내는데 반찬도 꾸준히 만들지 않으면 감이 떨어져부러요. 그래서 백반을 손에서 못 놓는 겁니다. 음식이란 건 정직해서, 만드는 사람이 번거롭고 힘들어야 맛이 나요."

―시 창작도 그런가요?

"시하고는 좀 달라요. 음식은 머리로 고민해야 나오고 시는 가슴으로 씁니다. 어제는 고춧가루, 함초소금, 매실청 등 다섯 가지 양념으로 만들었다면 오늘은 하나를 빼볼까, 저는 이것이 요리의 본질이라고 생각해요. 신선하지 않고 뭔가 숨겨야 할 때 양념이 강해지는 것 아닐까요. 맛이 복잡해지는 게 아니라 단순 명료해지는 쪽으로 가야 해요. 시도 군살을 빼야 하니까 그 부분도 통하네요. 요즘엔 서울에서 비행기 타고 와서 식사하고 시집에 사인을 받아가는 손님도 종종 있어요."

―가장 자신 있는 요리라면.

"건정간국이에요. 건정은 말린 생선이고 간국은 젓국입니다. 말린 생선에 싱싱한 새우젓을 넣고 쌀뜨물에 끓이면 깊은 것이 다 용출돼부러요."

―시집에 '건정'이라는 시가 있더군요. '나도 한 번씩은 조금 피가 흐르더라도/ 가슴을 열어/ 겨울 쪽볕에 한나절은 말리고 싶다/ 졸여낸 것은 생선이나 사람이나/ 깊어지는 건 매한가지 아니겠나'

"막내(12)는 그 시가 제일 마음에 든대요. 저는 생활에서 시를 낚아 올립니다. 옥상에 올라가 바람과 햇볕에 생선을 말리는 걸 좋아해요. 신선한 준치는 그 건져올린 바다 냄새가 나고, 그렇지 않은 것은 그 생선의 냄새가 납니다. 시도 그래요. 신선한 시는 삶의 냄새가 나요. 그렇지 않은 시는 그냥 조합한 단어의 냄새를 풍기죠."

요리사 김옥종이 운영하는 식당 '지도로' 주방에서 양파를 썰고 있다. 조미료를 거의 쓰지 않는다는 그는 "씹을수록 재료의 맛이 살아나는 게 우리 집 밥상의 비결"이라고 했다.

라운드3: 도마와 칼로 시를 쓴다

김옥종은 결석을 예사로 하던 고교 시절에도 현대문학 수업이 있는 날엔 등교했다. 그 과목만큼은 1등이었다. '너의 절망은 왜 아무것도 잉태하지 못하는가/ 너의 비탄은 왜 아무것도 분만하지 못하는가'로 흘러가는 '꽃'은 교도소에서 우유갑에 쓴 시라고 했다.

―글감은 절망이나 외로움, 슬픔 같은 것인가요.

"저는 애잔할 때 시가 나와요. 시인을 곡비(哭婢)라고 하잖아요. 대신 울어주는 사람입니다. 그런 마음이 있어야 시가 나와요. 어느 날엔 갈치조림을 준비하고 있었어요. 갈치가 불 위에서 자글자글 끓고 있는데 문득 '너는 등짝은 시리지 않겠구나' 싶어 얼른 적어 놓았지요. 그런 씨앗이 확장돼 시가 됩니다."

―시가 영 안 나올 땐 어떻게 합니까.

"그럼 안 써요. 서너 개월 걸려도 그냥 냅둬요. 시 때문에 골머리를 썩이거나 일기 쓰듯이 하는 건 바람직하지 않다고 생각해요. 물때가 바뀌듯이 시가 들어올 때가 옵니다. 그럼 한 호흡에 쓰고 퇴고는 거의 안 해요."

김옥종 시 '통닭구이'

―요리할 때 원칙이라면.

"저는 시장에서 단골을 안 만듭니다. 단골을 두면 식재료 구하기는 수월하겠지요. 하지만 당일 그 시장에서 최고의 것을 사오기는 어려울 수 있어요. 오늘은 이 가게 물건이 제일 좋지만 내일도 그러리라는 보장은 없으니까요."

―다른 시인들의 시도 많이 읽었나요.

"저는 시를 제대로 배운 적이 없고 읽어본 것도 별로 없어요. 시인 대부분이 브로크(벽돌) 찍듯이 시를 맹글어불잖아요. 오염될까 봐 일부러 멀리했어요. 요즘엔 많이 읽습니다. 흔들리지 않는 제 시어가 생겼으니까요."

―시집도 판매하는 계산대 옆에 '시가 맛없으면 환불해드려요'라고 쓴 까닭은?

"'시가 맛있어요' 소리를 들으면 지릿지릿해요. 음식에 대한 칭찬과는 다른 감동이 밀려오는 겁니다. 시인들은 '김옥종만 가진 시어가 활어처럼 팔딱거린다'고 부러워해요. 저는 평론가들이 해석해줘야 하는 난해한 시는 쓰지 않습니다. 환불해간 분은 아직 없어요."

―시인에게는 시인만의 바다가 필요하지요. 김옥종 혼자만 아는, 무궁무진한 재료를 건져올리는 그 바다는 대체 어딥니까.

"하하하. 요리와 시는 그 점에서 똑같아요. 재료를 알아보고 활용할 줄 아는 직관이 중요합니다. 혼자만 아는 바다는, 저 주방에 불 옆입니다. 뜨거운 불 옆에 바다가 있는 것이죠. 저는 '섬놈'이잖아요. 뭍에서라면 쉽게 누리는 걸 못 누리며 자랐어요. 그런 회한이나 늘 먹던 식재료가 퇴적층처럼 제 안에 쌓여 있다가 조금씩 흘러나오는 것 같아요."

"창의성이 없는 요리사는 죽은 요리사"라고 말하는 김옥종은 시를 쓸 때도 비슷한 신조를 가지고 있다. 그러니 민어를 보고 '등 살은 막장에 얹어 먹고 목살은 묵은지에 감아먹고 늙은 오이짠지는 볼살에 얹어 먹고 고추참기름장에는 부레와 갯무래기 뱃살을 적셔먹고 갈비뼈와 등지느러미 살은 잘게 조사서 가는 소금으로 엮어내는 뼈다짐으로 먹어도 좋고…' 같은 노래를 뽑아낸다. 강제윤 시인은 이 시집 발문에 "요리가 곧 시가 되고 시가 또한 요리다. 그래서 그의 시는 맛있고 영양가도 충만하다"고 썼다.

김옥종은 힘쓰고 주먹질하던 손으로 연애하듯이 음식과 시를 만든다. “처음에 가졌던 마음이 훼손되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했다. 그는 30년 전 “깡패××랑은 더 이상 안 만나겠다”고 한 여자와 산다. 요리사를 거쳐 시인이 된 사내는 신혼 시절에 결혼 예물까지 팔아야 할 만큼 궁핍했다. 이번에 받은 인세로 아내에게 금가락지를 선물했다. 사랑은 주먹보다 강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