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는 비행기 타고 바다를 건너 먼 나라에 가기를 좋아한다. 아침저녁으로 밥상을 차려 내는 굴레에서 벗어나 다른 이가 차려 놓은 조식을 먹고 있노라면 그렇게 꿀맛일 수가 없단다. 아쉬운 게 하나 있다면 짧은 영어 실력 탓에 가이드의 뒤꽁무니를 졸졸 쫓아다니는 단체 여행객 신세를 면치 못한다는 점이란다. "아유, 나는 배낭여행 같은 거는 할 생각도 안 해. 이 나이에 무슨. 그냥 카페에서 따뜻한 커피 한 잔이랑 설탕 하나 달라고 말할 정도만 되면은 그만이야." 엄마는 그 꿈을 이루기 위해 주민센터에서 운영하는 영어 교실에 다니고 있다. 카세트테이프에서 CD를 거쳐 MP3로 영어 듣기 연습을 하고 있으니 꽤 오랫동안 공부해온 셈이다. 그럼에도 알파벳 '에이'를 '예이'라고 발음하는 걸 보면 그동안 도대체 무얼 배웠는지는 모르겠다.
갈 길이 구만리라 안 그래도 바빠 죽겠는데 세상이 엄마의 발목을 잡고 늘어졌다. 모두의 건강을 위해 주민센터 영어 교실이 무기한 휴강에 들어간 것이다. 집구석에 들어앉아 멍청하게 시간을 보내다가 치매에 걸리는 건 아닐까 겁이 난다는 엄마의 말에 나 역시 덜컥 겁이 났다. 학원이라도 다니라고 했더니 비싸서 싫단다. 독학이라도 하라고 했더니 '작심삼분(作心三分)'이란다. 그럼 전화 영어라도 해보겠느냐 했더니 옳거니 그건 괜찮겠단다. 인터넷에 서툰 엄마를 대신해 회원 가입을 진행했다. 빈칸에 아이디, 생년월일, 전화번호를 차례로 입력하다가 영어 이름 부분에서 손이 멈췄다. "엄마, 영어 이름이 뭐야?" 전화를 걸어 물었다. "베로니카. B, E, R, O… 아니, 잠깐만. 'B'가 아니라 'V'인가?" 요구 사항을 기입하는 칸에 '인내심이 강한 선생님으로 연결 부탁드립니다'라고 적어 넣은 후 신청 버튼을 눌렀다.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 엄마에게서 수업 내용이 녹음된 파일을 전달받았다. 못난 자식의 성적표를 받아 든 부모의 마음이 이와 같을까. 걱정 반 호기심 반으로 파일을 재생했다. 선생님은 엄마의 나이, 좋아하는 음식, 영어 이외 다른 언어를 공부한 적이 있는지 물었다. 하지만 엄마는 어떠한 질문도 맞받지 못하고 같은 말만 되풀이했다. "으음, 아임 쏘리~ 어게인~ 슬로우~" 엄마는 이러한 말을 하고 싶었을 터이다. 정말이지 미안하게도 당신의 말을 알아듣지 못했어요. 제가 내일모레 칠십인지라 영어를 공부하는 일이 쉽지가 않네요. 그래도 이대로 포기하고 싶지 않아요. 무척 번거로우시겠지만 다시 한번 천천히 말씀해 주실 수 있을까요? 엄마의 간절함을 알아챈 선생님은 "괜찮아요, 베로니카. 당신은 최선을 다하고 있잖아요. 그렇죠?" 하며 격려의 말을 아끼지 않았다. 그러자 엄마가 멋쩍게 웃으며 대답했다. "어게인~"
엄마는 스스로가 한심하다며 망연자실했다. 그러나 실망도 잠시, 될 때까지 해보겠으니 다음 수업을 신청해 달란다. 나는 엄마에게 응원의 말을 전하고 싶었다. 엄마의 말문이 열릴 때쯤이면 하늘길 또한 활짝 열릴 거라고. 기약이 없기는 하지만 그날이 오기를 손꼽아 기다려 보자고. 그렇게만 된다면 엄마랑 나랑 비행기 타고 바다를 건너 먼 나라에 가자고. 사이좋게 팔짱을 끼고 하염없이 거리를 걷다가 다리가 아프면 카페에 들어가자고. 그러고는 그동안 갈고닦은 영어로 따뜻한 커피와 설탕을 주문해 달라고 말이다. 이왕이면 멋들어지게 영어로 이야기하고 싶었으나 이를 어쩌나, 나 또한 엄마를 닮아 영어를 못하는 걸. 나는 이 모든 말을 뭉뚱그려 '콩글리시'로 말했다. "베로니카, 파이팅!" 나의 말을 찰떡같이 알아들은 엄마가 활짝 웃으며 대답했다. "땡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