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갈한 나무 카운터에 앉는다. 흰색 조리복을 입은 셰프가 서 있다. 카운터에 앉은 손님은 열명 남짓. 그때부터 두 시간 동안 식사가 진행된다.
"36.5도가 만들어내는 수예품."
안효주 '스시 효' 셰프가 저서 '초밥산책'에서 정의한 말이다. 갓 지은 밥을 사람의 체온까지 식힌 후 밥과 재료의 조화로 맛을 내기 때문이다. '스시 코우지'의 코우지 셰프는 "스시(초밥)는 나온 지 15초 안에 먹어야 맛있다"고 말했다. 스시 오마카세 집은 만드는 사람도, 먹는 사람도 말이 없다. 오마카세는 '맡긴다'는 뜻의 일본어. 셰프가 만들어주는 대로 먹는 방식을 말한다.
2003년 서울 신라호텔 아리아께가 일으킨 스시 오마카세 붐이 거의 20년. 그 제자들이 자신의 업장을 차리면서 가게 수가 급속히 늘고 있다. 한 셰프는 "강남에는 스시 오마카세 집이 김밥집보다 많다는 우스개도 있다"고 말했다. 초밥 격전지 청담동에서는 2년만 넘어도 노포(老鋪)로 불린다. 그러다 보니 지방에 가게를 여는 셰프들도 많이 생겨났다. 미식가들은 셰프들을 좇아 '스시 투어'를 떠난다. 예전엔 "스시는 일본에서" "여름엔 해변에서" 했던 사람들이 코로나와 장마로 길이 막히자 지방 스시 맛집으로 눈을 돌리고 있다.
◇신도시의 축복
"좋은 초밥 요리사는 칼만 있으면 어디든 갈 수 있다. 마치 사무라이처럼."
영화 '아메리칸 초밥왕'은 미아 데트릭의 책 '스시'에 나오는 이 문장으로 시작한다. 경기 화성시 '세야스시'의 장성태(49) 셰프를 가장 잘 설명하는 말이다.
한국인 최초 일본전국스시대회 수상, 도쿄 리츠칼턴, 나고야 르네상스 호텔 등을 거쳐 국내 스시모토, 스시산원 등에서 활약한 그는 5년 전 홀연히 동탄으로 내려왔다. 이유는 단지 "시끄러운 서울을 떠나고 싶어서."
오마카세는 보통 맛이 담백한 흰살 생선으로 시작한다. 그러나 이곳은 등 푸른 생선인 전어가 시작이다. 살짝 시큼함이 입맛을 돋운다. 비린 맛 없이 감칠맛으로 뭉쳐진 이 한 점에 기대감이 높아진다. 장 셰프의 별명은 '히카리모노(등 푸른 생선)의 대가'.
'황돔→전갱이→가리비→광어지느러미→단새우→참치' 등으로 이어지는 코스에 디저트인 푸딩까지 먹고 나면 왜 이곳을 '동탄의 축복'이라고 부르는지 알 수 있다. 동탄에서 차로 30분 떨어진 분당에는 '스시야'가 있다. '스시마츠모토' 수셰프로 있었던 이정운 셰프가 독립해 차린 곳이다. 간이 센 밥과 기름진 회의 조화가 훌륭하다.
◇KTX 타고 '스시 투어'
초밥은 동남아 음식에서 시작됐다는 게 통설. 기원전 5~3세기 중국에서 만든 세계 최초의 백과사전 '이아(爾雅)'에 최초로 등장한다. 초기 형태의 초밥은 우리의 가자미식해처럼 생선이 상하지 않게 쌀과 함께 삭힌 것. 지금 형태의 초밥이 등장한 건 불과 200년 전이다.
국내 스시 오마카세는 2003년 아리아께의 모리타 셰프에 이어 2008년 조선호텔 스시조가 마쓰모토 셰프를 스카우트하면서 양강 구도를 이뤘다. 지금도 매월 15일 오전 9시면 모리타 셰프 예약을 위한 전쟁이 시작된다. "200번 넘게 걸었는데 실패했다"는 후일담이 쏟아진다. 스시조 출신 이진욱 셰프가 독립한 '스시인'은 단골 아니면 예약이 어려울 정도.
이런 예약 전쟁을 떠나 애호가들은 기차를 타고 아리아께 출신 이승철 셰프가 하는 대전 '스시호산'에 간다. 젤리 같은 식감의 아카미(참치 등뼈 속살), 입안에서 녹는 주토로(참치 뱃살)가 대표 메뉴. 만화책 '미스터 초밥왕'에서 "스시집 재료의 상태는 참치로 알 수 있다"고 했다.
기차를 타고 조금 더 내려가면 '대구'. 여기엔 스시조 출신 셰프의 '스시민종우'가 있다. 영남권 최고의 스시 전문점으로 불리는 곳이다. 인근 부산·울산 등에서도 이 맛을 보러 원정 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