젊은 시절에는 이성 친구만 봐도 열없어서 볼이 빨개지곤 했다. 그땐 빨개진 볼이 또한 열없기 짝이 없었다. 누군가 빨개진 볼을 보고 "너 지금 열없구나" 그런 말이라도 들을라치면 그땐 정말 쥐구멍에라도 들어갈 것처럼 고개를 푹 숙이곤 했다. '열없다', 그 말 자체가 주는 부끄러움과 수줍음도 상당히 컸던 것이다.

여고 시절 총각 선생님을 짝사랑한 적이 있었다. 그런데 그 선생님께서 다른 학교로 전근 가신다는 소문이 나자 나만 그런 게 아니었다는 걸 알게 되었다. 그날 우리는 모여서 편지를 썼다. 지금 생각해보면 유치하게까지 느껴지지만 그땐 오직 떠나는 선생님에 대한 생각으로 가득했다. 편지 전문은 생각나지 않지만 "선생님은 저희의 V.I.P입니다"라고 썼던 기억은 지금도 생생하다.

예쁜 편지지에 손 편지를 쓰고 꽃봉투에 담아 선생님이 살고 계시는 곳 담장 너머로 던졌다. 그날 아무도 우릴 보는 사람이 없었는데도 우리는 괜스레 열없고 떨렸다. 다음 날 선생님 수업 시간에 우리는 고개를 들 수 없었다. '어제는 참 고마운 편지를 받았다'고 말씀하실 때 우리는 약속이나 한 듯이 뺨이 붉어지고, 그렇게 들키고 말았다. 돌이켜 보면 참 좋은 시절이었다.

지금은 웬만해선 얼굴이 붉어지지 않는다. 열없음이 사라진 때문이다. 동시를 쓰는 나는 언제나 동심을 잃지 않으려 노력한다. 그런 관점에서 보면 열없어하는 마음이 소중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나이를 먹어도 매사 덜 뻔뻔하게 살고 싶은 소박한 꿈을 꿔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