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러스트= 안병현

어린 시절의 집을 기억하시나요? 지금은 아무도 살지 않는, 혹은 헐려버린 그 집 말입니다.

그 집을 기억 속에 남겨두고 떠나온 분들은 행복한 분들입니다. 그 집으로부터 힘겹게 탈출한 사람들도 많습니다. 언니는 앞문으로, 동생은 뒤창으로… / 홍여사

"우리 옆집 살던 정란이 엄마라고 있지? 가끔 부침개며 카스텔라 같은 거 만들어서 잘 갖다주던."

며칠 전 친구 장례식에 다녀온 엄마는 옛 이웃들의 이런저런 소식을 듣고 왔나 봅니다. 학년이 달라선지 '정란이'에 대해서는 기억나는 게 별로 없는데, 정란이 엄마라는 분은 저도 기억이 납니다. 그 카스텔라! 달콤하고 좀 진득하고 아직 따뜻하던….

"그이도 그새 저세상으로 갔단다. 췌장암으로 그렇게 고통스러워했대. 어휴 망할 것…."

"누구 말이야? 왜?"

엄마의 입버릇인 '망할 것!' 소리에 착한 언니가 살뜰히 대꾸를 해줍니다.

"누구긴? 정란이 그년 말이지. 어릴 적부터 속 썩이더니 엄마 노후 자금도 다 까먹고, 마지막엔 아픈 엄마 돌보지도 않았단다. 그게 다 오냐오냐 키워서 그런 거야. 초장에 두들겨 패서라도 버릇을 고쳐놨어야지. 매 끝에 효자 난다지 않니?"

이쯤 되면 엄마한테서 무슨 얘기가 이어질지 알기에 저는 식탁 위의 빈 잔들을 챙겨 싱크대로 갔습니다.

"난 너희 그렇게 안 키웠다. 이건 아니다 싶으면 정신이 번쩍 나게 혼을 내줬지. 그랬더니 봐라. 이렇게 반듯하게 커서 사람 구실들 하고 살잖니. 그러니 너희도 자식새끼 싸고돌지 말고 팰 때는 패 가며 똑바로 키워. 그래야 나중에 효도 받아. 특히 은정이 너! 내 말 알겠냐?"

엄마는 화살을 내게로 돌립니다. 내가 엄마의 말에 아예 귀를 닫고 있다는 걸 아시는 거죠. 그럴 땐 그저 네, 네 하면 넘어가는 건데, 저는 왜 그게 안 될까요?

"정란이 아줌마 집에 가서 우리 카스텔라 얻어먹고 온 적 있는데, 언니 그거 기억나?"

"그랬었나?"

"그날 우리 엄마한테 엄청 맞고 맨발로 쫓겨났잖아. 아픈 거보다 창피해서, 멀리 가지도 못하고 그 집 쪽으로 담 넘어가 무슨 장독대 같은 데에 나란히 붙어 앉아 있었는데, 아줌마가 들어오라고, 엄마 화 풀리실 때까지 카스텔라 먹고 놀다 가라고…. 정말 집 안에 카스텔라 굽는 냄새가 가득했었지. 나한테는 정란이 엄마가 아니라 카스텔라 아줌마였어."

"그랬던 것 같기도 하고…."

언니는 기억 안 나는 척하는 게 분명했습니다. 왜냐하면 그런 일이 단 한 번이 아니라 몇 번이나 되거든요. 엄마한테 맞고 쫓겨나거나, 혹은 맞을까 봐 숨어 있을 때, 특히 추운 날 신발이 없을 때나, 쥐어뜯긴 머리가 산발이 되어 있을 때 아줌마는 우리를 손짓해 불러들였습니다. 언니는 그래도 자존심이 있었는지, 안 가겠다고 하는 걸 제가 졸라서 갔었죠. 좀 의외였던 건 그 집안 살림살이가 우리 집과 별로 다를 바가 없었다는 겁니다. 난 그 집이 허름한 것과는 달리 동화 속 집처럼 잘 꾸며져 있을 줄 알았거든요. 그래서 그 아줌마는 여간해 화가 잘 안 나는 거라 생각했었습니다.

"거참, 그 여편네도 오지랖이네. 자기 딸 간수나 잘하지 남의 딸들 가정교육에 웬 참견이었다니?"

예전 같으면 "그래 나는 계모보다 못한 어미고, 부모 자격도 없는 어미다"라고 화내며 "부모 은공도 모르는 망할 것"이라고 소리쳤을 엄마가 어쩐 일로 약한 모습을 보입니다. 그럼 나도 그쯤에서 물러서야 하는 줄 아는데, 그게 또 마음처럼 잘 안 되죠.

"아줌마는 한 번도, 무슨 일로 엄마한테 야단맞았느냐고 안 물었어. 난 그거 물을까 봐 걱정됐거든. 왜냐하면…."

"넌 참 쓸데없이 기억력도 좋다. 그 머리로 공부는 왜 못 했니?"

언니가 내 말을 틀어막습니다. 내가 무슨 말을 하려는지 알기 때문이죠. 나는 엄마한테 왜 혼나야 하는지 이유를 모를 때가 많았습니다. 일하고 들어온 엄마는 현관문을 열기 전부터 우리를 혼내려고 마음을 먹고 있었거든요. 대상은 주로 큰딸. 집 안 청소가 안 돼 있다거나, 잠이 들어서 문을 빨리 안 열어줬다는 이유로, 해가 졌는데 불을 안 켜고 있다는 이유로, 어떨 땐 불을 켜놓았다는 이유로, 때론 동생 받아쓰기 점수가 30점이 되도록 내버려뒀다는 이유로…. 열 살 남짓한 아이에겐 그 모든 것이 맞아야 할 이유였고, 욕을 먹고 무릎을 꿇어야 할 이유였으며, 동생과 함께 집 밖으로 내쫓겨야 할 이유였습니다. 그 모든 이유를 엄마는 다 잊었겠지만 저는 아프게 기억하고 있습니다. 나보다 더 호되게 맞았던 언니는 어떨까요?

우리 언니는 천사이거나 바보입니다. 혼자된 엄마를 모시고 살며 지나간 이야기는 일절 꺼내지 않습니다. 학대와 훈육의 경계에 있던 그 모든 비명과 굴욕의 순간들을 진짜 잊은 걸까요?

오늘 아침 언니가 전화해서 어제의 제 행동을 나무라더군요.

"너 엄마한테 자꾸 그런 소리 할 거면 우리 집에 오지 마. 지금 생각해보면 이해도 가지 않니? 엄만 정말 그 시절에 녹초가 되도록 일만 하고, 빚쟁이한테 시달리며 힘들게 살았어. 아버지가 미안해하기나 했니? 도리어 냉정하게 대했지. 난, 자식 키워보니까 젊었던 엄마가 불쌍해. 우릴 때릴 때 그 마음은 어땠겠니?"

"아니, 난 자식 키워보니 엄마가 더 이해 안 돼. 바라보기도 아까운 게 자식이던데, 걸핏하면 같이 죽자고 칼 꺼내고, 불 지른다고 난장판 만들고. 완전히 미친 사람이었어."

"맞아. 엄만 그때 미쳐 있었던 거야. 미치지 않고는 못 버틸 상황에서도 끝까지 우릴 붙들고 있었다고, 그렇게 생각하면 안 되겠니?"

난 왜 그게 안 될까요? 엄마에 대한 미움이 한 번씩 내 마음에 몰아칩니다. 아직도 엄마 앞에 고분고분한 언니 또한 밉습니다. 언니는 거짓말을 하고 있거나, 아직도 엄마의 거짓말에 속는 겁니다. 이게 다 너를 위한 거라는….

"난 언니가 나랑 같이 엄마를 미워해 주고, 욕해주면 좋겠어. 그럼 내 미움이 좀 가실 거 같아. 기억 안 나? 우리 예전에 아줌마네 집 담 밑에 앉아서 약속했었잖아. 우리 엄마 같은 엄마는 되지 말자고. 카스텔라 아줌마 같은 엄마가 되자고."

"은정아…."

"…."

"난 한 번만이라도 엄마의 따뜻한 사랑을 받아보고 싶어. 미움보다는 그 마음이 더 커. 그게 나한테는 더 고프고 목 말라."

"언니…."

"넌 안 그러니? 너도 분명히 그럴 거야. 너도 나처럼 엄마 없이 컸잖아…."

※실화를 바탕으로 재구성한 사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