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잃어버린 얼굴 1895’의 명성황후역 뮤지컬 배우 박혜나는 “부채는 장면마다 작은 떨림 같은 변화로 명성황후 ‘민자영’의 두려움이나 안도감 같은 감정을 드러내는 도구”라고 했다.

"못 할 수도 있겠구나 싶었는데…. 이제 저를 증명해야 할 시간이 왔네요."

우여곡절 끝에 무대에 서게 된 기분을 물었더니, 뮤지컬 배우 박혜나는 "다시 '숨겨진 세상'으로 모험을 떠나는 기분"이라며 웃었다. '숨겨진 세상'은 그가 부른 '겨울왕국 2'의 주제곡 'Into The Unknown'의 우리말 제목. 박혜나는 지금 서울 예술의전당 토월극장에서 공연 중인 서울예술단 창작가무극 '잃어버린 얼굴 1895'의 주인공 명성황후다. 이 작품은 8일로 예정됐던 개막이 코로나 감염자 수 증가로 기약 없이 미뤄지다, 지난 18일에야 첫 공연을 올렸다. "기다리고 마음 졸였던 이유가 있을 거예요. 무대 위에서 그 이유를 찾고 싶어요."

2006년 데뷔한 박혜나는 2013년 뮤지컬 '위키드'의 한국 라이선스 초연에서 녹색 마녀 '엘 파바'로 주목받았다. '겨울왕국'의 엘사를 연기한 뮤지컬 배우 이디나 멘젤이 초연 때 맡았던 역할. "일도 없고 통장 잔고는 '0'이고 부모님 눈치도 보이는데, 하고 싶은 건 뮤지컬밖에 없고…. 직업이 뭐냐 물으면 '오디션 보는 거'라고 우스개 하던 때, 오디션 뒤 반 년이 지나 합격 연락이 왔어요. 그것도 '엘 파바'에!" 강력한 두성(頭聲)의 고음으로 반주를 찢으며, 객석에 명확한 발음으로 노래를 전달하는 벨팅 창법이 높은 평가를 받았다. 박혜나가 부르는 엘 파바의 '중력을 거슬러(Defying Gravity)'는 지금도 전율 그 자체다. 이어서 "잭팟 터지듯" 일이 풀려나갔다. 디즈니가 '한국의 엘 파바'인 그에게 '겨울왕국' 노래를 맡겼다. "디즈니 비밀주의 때문에 이쑤시개 같은 게 돌아다니는 CG 화면을 보며 노래했죠. '노래는 괜찮은데 이게 되겠나' 싶었는데…. 개봉 뒤 영화를 보고 깜짝 놀랐어요, 하하!" 전국의 초등 여학생들이 박혜나가 부른 '다 잊어(Let It Go)'를 따라 부르기 시작했다. 깜짝 스타가 됐다.

배우는 미지의 얼굴에 새로 선과 색을 입히고 생기를 불어넣는 사람. 평생 사진을 남기지 않았던 '잃어버린 얼굴 1895'의 명성황후는 평가도 극명하게 엇갈린다. 어떤 인물로 그리려 하느냐는 우문(愚問)에, 박혜나는 "관객이 판단하게 하고 싶다"고 현답(賢答)했다. "정략에 휩쓸려 궁으로 들어가며 '누구실까, 고우실까, 그분도 날 사랑해줄까' 노래하는 소녀에서, '국권을 되찾아 떳떳한 모습으로 사진을 찍겠다'고 말하는 정치가가 되죠. '내가 조선의 국모다' 하는 황후도, '나라 망친 요망한 계집' 민자영도 아닌, 그사이 어딘가에 있는 입체적 인간의 결과 길을 보여드리려 해요. 평범한 다른 사람처럼 어리석고 고뇌하며 살아갔던 한 인간의 모습요."

박혜나가 극 중 명성황후가 얼굴을 가릴 때 쓰는 검붉은 부채를 '촥' 하고 펼쳤다. 금속으로 날카롭게 세공한 꽃 같다. 딱 1주일, 그가 그리는 명성황후의 드라마가 꽃잎처럼 무대로부터 객석으로 날려 관객의 마음을 벨 것이다. 공연은 26일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