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축구 선수, 가수, 연예인, 프로게이머, 먹방 유튜버 말고 현실적인 꿈을 가져봐. 좀 현실감 있게!"

진로 지도 교사가 호통쳐 보지만, 아이들은 별 관심이 없다. 딱 한 명, 화려하게 여장(女裝)하고 무대에 서는 '드랙퀸이 되고 싶다'고 이미 결심한 제이미만 빼고. 짓궂은 친구들은 게이라며 놀려대고 이해심 달리는 어른들은 실눈 뜨며 '쯧쯧' 혀를 차지만 제이미는 아랑곳하지 않는다. 이미 자기 꿈을 정한 소년의 마음이 노래한다. "시간은 너무 더디게 흘러, 시곗바늘이 갈 길이 너무 멀어…."

열일곱 살에 드랙퀸이 된 영국인 소년 ‘제이미’를 연기하는 아이돌 그룹 ‘2AM’의 조권. 가볍게 통통 튀는 평소 이미지 그대로 맞춤옷을 입은 듯 잘 어울린다.

뮤지컬 '제이미'는 15세에 커밍아웃하고 17세에 드랙퀸이 된 영국 북부 셰필드의 소년 제이미 캠벨의 실제 이야기. BBC 다큐멘터리로 먼저 화제를 모았고, 웨스트엔드 뮤지컬로 만들어져 2018년 영국 공연계 최고상인 로런스 올리비에 어워드에서 최고 신작 뮤지컬, 남우주연·조연상, 안무상 등 4개 부문 상을 받았다. '남들이 뭐라든 신경 쓰지 말고 네 갈 길을 가라'고, '넌 너 자체로 아름답고 완전 소중하다'고 말하는 제이미의 무한 긍정 에너지에 홀린 관객들이 서울 역삼동 LG아트센터를 달구고 있다.

누구나 어린 시절 한때는 제이미였다. 대개 밥 굶기 딱 좋은 작가나 예술가가 되겠다는 희망 따위 일찍 접기 마련이지만, 꿈을 지켜주려는 좋은 사람들이 주변에 있다면 얘기가 달라진다. 제이미의 엄마 '마가렛'(최정원·김선영)은 아들의 17세 생일에 120파운드짜리 빨간 하이힐을 선물하고, 이모 '레이'(정영아)는 포클레인 기사나 광부가 딱 좋다고 적힌 조카의 적성검사 결과지를 쫙쫙 찢어 쓰레기통에 버리며 말한다. "제이미 너는 이 지구에 한정판으로 출시된 신인류다. 이 이모는 제이미 보유국에 사는 게 너무 행복하다!" 제이미의 가장 좋은 친구인 파키스탄 이민자 소녀 '프리티'(문은수)의 응원도 눈물겹다. "두려운 건 알아, 하지만 넌 강해. 널 위한 파티는 이미 시작됐어!" 별난 꿈을 응원해주는 사람들의 힘으로 제이미는 클럽 무대에 드랙퀸으로 데뷔하고, 졸업 파티에도 화려한 드레스에 하이힐을 신고 가기로 결심한다. 하지만 세상이 그리 녹록하게 제이미를 내버려둘 리 없다. 규정을 앞세우는 학교, '역겹다'며 멸시하는 아빠에 맞서 꿈을 찾아가야 하는 제이미의 성장기가 시작된다.

런던 웨스트엔드 뮤지컬 무대와 음악을 그대로 옮겨온 라이선스 뮤지컬. LG아트센터의 큰 무대를 좁혀 정육면체에 가까운 무대 공간을 만들었는데, 오히려 집중도가 높아지고 군무가 밀도를 더하는 느낌을 준다. 2막 초입 신나는 펑키 리듬의 '모두가 제이미 얘기를 해'(Everybody's Talking About Jamie)를 부를 때의 합창과 군무 장면 등이 특히 그렇다. 극 전개도 경쾌하고 발랄해, '치마 입은 남자는 우습고, 드랙퀸은 경이롭다' 같은 재치 있는 대사들이 이어지며 객석에 웃음 폭탄을 던진다.

그룹 '2AM'의 조권, 그룹 '아스트로'의 MJ, 그룹 '뉴이스트'의 렌, 배우 신주협 등 젊은 배우 4명이 '제이미'로 열연한다. 조금 서툴지만 무대를 즐기며 자신을 맘껏 드러내는 젊은 배우들의 에너지가 풋풋한 제이미 이야기와 맞춤하게 어울리는 느낌. 박병성 공연 평론가는 "전통적 뮤지컬보다 팝과 힙합 느낌이 강한 음악 덕에 극에 쉽게 빠져들 수 있고, 주변 사람들과 제이미의 밝고 긍정적인 이야기가 주는 감동도 큰 작품"이라고 했다. 9월 11일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