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원순 전 서울시장은 자신에 대한 성추행 고소인 조사가 끝난지 8시간 만에 유서를 남기고 북악산으로 향했다. '공무원수사개시 통보'라는 공식적·합법적 통보 절차가 이뤄지기도 전이었다. 고소인인 A씨 측은 "박 시장이나 서울시장 비서실에 고소 사실을 암시하는 등의 행위는 일절 하지 않았다"고 13일 밝혔다. 결국 청와대나 여당, 경찰 가운데 한 곳이 고소 접수 사실을 박 전 시장에게 불법적으로 알려줬을 가능성이 크다는 의미다.

14일 경찰과 A씨 측 설명을 종합하면, A씨와 그의 법률대리인 김재련 변호사는 8일 오후 4시 30분 서울 종로구 내자동 서울지방경찰청 민원실에 도착, 고소장을 냈다. 그 즉시 서울경찰청 여성범죄수사팀 여성 수사관들이 A씨 등을 청사 밖 조사실로 안내했고, 오후 5시를 전후해 조사가 시작됐다. A씨는 조사에서 박 전 시장이 자신의 속옷 차림 사진을 보내거나, 늦은 밤 텔레그램 비밀 대화방 대화를 요구하고, 음란한 문자메시지를 보냈다고 설명하며 관련 사진 등을 경찰에 증거로 제출했다.

고소장 내용을 확인한 수사팀은 '고위 공직자 성(性) 비위 사건'으로 판단, 조사 도중 상부에 보고했다. 사건 개요가 서울경찰청 생활안전부장을 거쳐 서울경찰청장에게까지 전달됐다. 서울경찰청 고위 관계자는 "(박 시장에 대한) 강제 수사 여부도 검토하던 중이었던 것으로 알고 있다"고 전했다. 사안이 중대하다고 판단한 서울경찰청은 8일 오후 7시쯤 상급 기관인 경찰청(본청)에 이 사건을 보고했다. 경찰청은 추가적인 사실관계 확인 등을 거쳐 청와대 국정상황실에 보고했다. 그 시각이 오후 8~9시로 추정된다.

이 무렵 박 전 시장은 서울 강북구의 한 식당에서 민선 5~7기 전·현직 구청장 11명과 저녁 식사 중이었다. 만찬은 오후 7시에 시작해 9시 10분쯤 끝났다. 친목 모임이었던 이 자리의 분위기는 "끝까지 가볍고 유쾌했다"고 한다. 박 전 시장은 반주로 막걸리도 두 잔 마셨다고 한다. 피고소 사실을 알았다면 이 모임을 취소하거나, 중도에 자리를 떴을 가능성이 크다.

A씨에 대한 경찰 조사는 9일 새벽 2시 30분에 끝났다. 날이 밝고 얼마 지나지 않은 오전 10시 44분, 박 전 시장이 서울 종로구 가회동 서울시장 공관을 나섰다. 공관에는 유서가 남겨져 있었다. 이날 박 전 시장은 정세균 국무총리와 점심을 먹기로 했었지만, 당일 오전 직접 정 총리에게 전화를 걸어 약속을 취소했다. 그리고 그날 자정 무렵 북악산 기슭에서 시신으로 발견됐다.

청와대나 여당은 기밀 누설 의혹을 즉각 부인했다. 청와대는 그동안 중요 정보가 외부에 유출됐을 경우 내부 직원들 휴대전화까지 조사해 왔다. 그러나 이번에는 이런 검증 과정 없이 피해자 측 기자회견 당일에 곧바로 유출 의혹을 부인했다. 경찰이나 청와대의 고위층 개입 없이 유출됐을 가능성도 있다. 청와대에는 박 전 시장의 서울시 핵심 참모 출신 행정관 B씨가 있고, 서울시에는 청와대 출신 C씨가 근무하고 있다. 정무수석실 등 대통령 비서실 곳곳에도 민주당 또는 박 전 시장과 친분 있는 인사들이 있다. 이들이 박 전 시장에게 정보를 줬을 수 있다.

서울시청과 행정안전부에 파견된 경찰관도 있다. 서울시장 비서실에는 서울경찰청 소속 경찰관이 근무하며 '연락관' 역할을 한다. 본지는 해당 경찰관에게 수차례 연락했지만, 받지 않았다. 행정안전부 치안정책관실에도 경찰관 4명이 파견돼 상주한다. 다만 행안부 치안정책관실 관계자는 "관련 내용을 보고받은 일이 없다"고 했다. 한 여권 인사는 "지난 4월 서울시장 비서실에 근무하는 한 남성 직원이 여성 직원을 성폭행한 혐의로 입건된 사건이 발생한 이후 시장실에서 관련 동향에 대해 촉각을 곤두세운 것으로 안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