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주역(驛)에 마중 나온 사람 중에서 강정화(51) 간호사를 단번에 알아보지 못했다. 그녀가 멋진 색상과 무늬의 원피스를 입고 있었기 때문이다.

"여기까지 내려와 만날 만한 사람이 저는 못 됩니다. 마치 봉사의 삶을 살아온 것처럼 저를 과대평가하는데 사실 이번이 처음이었고, 봉사라기보다 간호사 직업의 본분을 수행한 것뿐입니다."

그녀는 지난 3월 대구에서 코로나가 폭발했을 때 자원한 간호사였다. 영남대 병원 음압병실에서 6주를 근무했다. 그 뒤 자신이 코로나 양성 판정을 받아 음압병실에 격리됐다. 그 기간 우울증과 공황장애를 겪었다고 한다.

강정화 간호사는 "힘들지만 우리 직업이고 누군가 해야 한다면 피해서는 안 된다"고 말했다.

한 달 만에 퇴원해 일상으로 돌아온 그녀는 얼마 전 중앙재난안전대책본부에 연락해 '일손이 부족하면 언제든지 다시 가겠다'고 했다고 한다.

"코로나가 다시 확산되니 누군가는 병동에 있어야 하잖아요. 저는 이미 음압병실에서 일해 봤고 코로나에 걸려 항체까지 생겼으니 다른 간호사들보다 훨씬 더 조건이 나아요. 하지만 연락한 다음 날 '좀 위험할 것 같다'는 답변이 돌아왔어요. 그래서 지금은 전주의 대자인병원에서 주 3일 야간 전담 근무를 하고 있어요."

공포의 방호복

―방호복을 입고 그 고생을 하고 코로나에 걸리기까지 했는데 또 자원했다는 건가요. 힘든 기억이 금방 잊혔나요?

"힘들지만 우리 직업이고 누군가는 해야 한다면 해야지요. 지금도 방호복을 입고 간호하는 분들이 있지 않나요. 이 일이 끔찍해서 안 하겠다면 간호학과를 왜 나왔나요."

―대구에 가겠다고 자원했을 당시 전주의 암 전문 요양병원에서 수간호사로 근무하고 있었지요?

"예. 2월 27일 출근 준비를 하면서 '대구에 의료진이 모자란다'는 방송 뉴스를 봤어요. 대구에서 확진자가 하루 새 340명이 늘어난 날이었어요. 문득 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때는 코로나에 대해 막연한 두려움이 훨씬 컸는데, 왜 그런 생각을?

"복잡하지 않았어요. 대부분 사람이 다 그렇지만, 저는 지금껏 자신과 가족을 위해 살아왔어요. 하지만 인생에서 한 번쯤은 저를 꼭 필요로 하는 사람들을 위해 살겠다는 단순한 마음이었지요. 남편과 딸은 '평소에 안 이랬는데 왜 갑자기 이럴까' 하며 좀 당황했습니다."

2월 28일 저녁 질병관리본부에 신청하자, 바로 다음 날 아침에 '내일부터 영남대병원에서 일해달라'는 연락이 왔다. 그녀는 근무하던 병원에 '여기는 내가 없어도 체계적으로 돌아간다. 2주만 봉사하고 오겠다. 못 돌아오면 사직 처리를 해달라'고 했다. 바로 그날 차를 몰고 대구로 갔다. 대구는 난생처음이었다고 한다.

"화창한 날씨였는데, 대구 거리에는 사람이 보이지 않았어요. 텅 빈 도시를 보니 무서웠어요. 영남대병원에 도착하니 아수라장이었어요. 다음 날 출근해 파견 간호사들과 함께 오리엔테이션을 받았어요. 방호복을 처음 입어봤을 때 '질식해 죽는 것이 이런 기분이구나. 과연 이걸 입고 일해낼 수 있을까' 불안했어요."

다음 날부터 그녀는 영남대병원 402병동 음압병실에 곧바로 투입됐다. 방호복을 입고 두 시간씩 교대로 근무했다. 하루에 두세 차례 방호복을 입고 벗었다.

―어떤 간호사는 '공포의 방호복'이라고 표현했더군요. 화장실에 가기 어려워 물과 커피도 안 마셨다고 하더군요. N95 마스크나 고글의 압박감도 몹시 심하다고 들었습니다.

"방호복을 입는 순간 땀이 비 오듯 쏟아집니다. 가운과 속옷까지 다 젖었어요. 방호복을 벗을 때마다 샤워를 해야 했어요. 3월인데도 그랬으니, 지금 현장에서 방호복을 입고 일하는 의료진은 훨씬 더 고생일 겁니다. 마스크 착용으로 콧잔등은 늘 헐었고 고글에는 김이 서려 잘 안 보였어요."

―음압병실에서 어떤 일이 주어졌나요?

"환자 50명에 간호사 4~8명이 한 팀으로 들어갔어요. 방호복에 고글과 장갑을 쓴 채로 환자들의 바이탈(활력) 체크, 주사 처치, 투약 등 통상 간호 업무뿐만 아니라, 처음에는 환자들의 대소변 기저귀, 주사기나 일회용품 등 적출물을 수거하고, 병실 청소·소독까지 했습니다. 병실 청소를 담당하는 분들이 '음압병동에는 안 들어가겠다'며 보이콧을 했거든요."

―자원해왔지만 첫날 근무해보니 어떤 마음이 들던가요?

"음압병실에 투입되면 쉴 새 없이 일해야 했어요. 그때까지 해온 간호 업무 중에서 가장 심한 중노동이었어요. 방호복으로 숨은 쉬기 어려운데 너무 고강도 노동이라 죽을 것 같았습니다. 저는 '과연 살아서 집으로 돌아갈 수 있을까' 싶었습니다."

―그 뒤 시일이 흐르니 요령이 생겨 좀 익숙해졌습니까?

"간호사 일에는 요령은 없습니다. 인내만 있을 뿐이었지요. 누군가는 이 일을 해야 한다는 마음으로 버텼지요."

―돌보는 환자들은 어떠했나요?

"치매나 기저질환을 갖고 있는 고령 환자가 대부분이었습니다. 격리 상태라 환자들은 무섭고 힘들고 우울해했어요. 이 때문에 먹기만 하면 설사를 하는 환자도 있었고, 간호사들에게 욕하거나 화풀이하는 환자도 있었습니다."

―직전에 암 전문 요양병원에서 근무했으니, 여기서도 환자의 죽음에 대해 낯설지는 않았겠군요.

"다른 점이 있었습니다. 암 환자들의 상태는 가족이 다 압니다. 임종 시에는 가족이 손을 잡아줍니다. 하지만 격리된 코로나 환자들은 가족도 못 보고 외롭게 생을 마감합니다."

나는 죄인도 아닌데

―가족 대표가 방호복을 입고 음압병실에 들어가 마지막 작별은 할 수 있게 해준다고 하더군요.

"가족이 그걸 원하면 할 수 있도록 나중에 임종실이 마련됐습니다. 하지만 급격하게 상태가 악화된 환자의 가족에게 알려주니 '무서워서 안 들어가겠다'고 했습니다."

―당초 2주 계획으로 대구에 갔지요?

"예. 2주가 되는 날, 가족은 제가 당연히 돌아올 줄 알고 자가 격리를 위해 집을 비워놓고 식료품을 준비해놓았습니다."

―그런데 왜 6주까지 연장했습니까?

"영남대병원에서 '더 근무해줄 수 있으면 남아달라'고 했어요. 환자들의 입원 기간은 평균 한 달이 넘었습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퇴원하는 환자의 모습을 보고 싶었습니다. 어떤 치료 과정을 거쳐 어떤 상태로 병원을 나가는지 궁금했거든요. 6주쯤 지나자 대구 상황이 수그러들었습니다."

―6주 근무를 마치고 2주간의 '자가 모니터링(관찰)'을 했지요?

"방호복을 입고 근무했기에 이는 의무 사항은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음압병실 근무 기간이 길어 혹시 몰라서 그렇게 했어요. 대구시에서 지정한 호텔에서 자가 모니터링을 했어요."

―누가 챙겨주는 사람이 있었나요?

"객지인데 있을 리 없지요. 숙소에서 식사 해결이 문제였어요. 호텔 측에 부탁하니 아침마다 문고리에 크림빵과 우유를 걸어놓고 갔어요. 자가 모니터링의 경우에는 마스크를 쓰고 외출도 가능합니다. 너무 배가 고프면 마스크를 쓰고 나가 햇반·컵밥 등을 사와서 먹었어요."

―모니터링 2주를 마치기 하루 전날 검사에서 양성 판정을 받았는데?

"하지만 아무런 증상이 없었어요. 필름을 거꾸로 돌려봐도 제가 감염된 지점을 알 수 없었어요. 방호복을 입고 벗을 때도 철저히 했는데…."

―접촉한 의료진 중에서 감염자가 나오지 않았나요?

"제가 양성 판정이 나오자, 접촉한 의료진도 모두 자가 격리에 들어갔어요. 추적 역학조사를 했지만 저와 별로 접촉이 없었던 의사 한 분을 빼고는 모두 음성이었어요. 저는 CT를 찍어보니 바이러스성 폐렴균이 몇 점 발견됐지만 폐렴 증상은 전혀 없었어요. 건강한 사람에게는 문제가 안 되는 수준이었을 겁니다."

―전주로 돌아와 전북대병원 음압병실에서 격리 치료를 받았지요?

"예. 저 자신이 코로나에 대해 더 잘 아는데도, 담당 의사에게 '저 언제 나갈 수 있을까요?'라고 묻고 있었어요. 의사 선생님이 '옆방에 김성덕 간호사가 아직도 입원해있다'고 알려줘 엄청 놀랐어요."

―김성덕 간호사는 대구 동산병원에서 2주 근무한 뒤 고향의 산골 빈집에서 자가 격리를 하던 중 양성 판정을 받았지요. 서로 만난 적 있습니까?

"만난 적은 없습니다. 제가 영남대병원에서 5주째 근무하고 있을 때 이분이 확진 판정을 받았다는 보도에 안타까워했지요. 전북대병원에 입원한 걸 보고 '저분도 전주 사람이었구나' 했지요. 그런데 제가 같은 병원, 바로 옆 병실에 입원하게 된 겁니다. 격리된 상태라 서로 볼 수가 없었어요."

―음압병실에서 한 달을 지내보니 어떠했나요?

"아무런 증상이 없는데 양성 판정이 나오니, 저는 미치는 줄 알았어요. 차라리 증상이 심해 인사불성 상태로 치료를 받는다면 모를 수 있는데, 동료도 없고 산책은커녕 병실 바깥으로도 못 나갑니다. 잠을 못 자고 먹지도 못했어요. 나는 죄인도 아닌데 왜 갇혀있는가, 과연 여기서 나갈 수 있을까, 자유를 찾을 수 있을까…, 우울증에 공황장애까지 왔어요."

저희도 바빴기 때문에

―연속 두 차례 음성 판정이 나와야 격리에서 풀려납니다. 하지만 음성 판정을 받아도 두 번째 검사에서 양성이 나와 못 풀려나는 경우가 있지요. 전혀 증상이 없어도 양성 판정만으로 한 달 이상 갇혀있는 사례도 있어요.

"현장 의료진 사이에서도 '음성 판정을 받고서 다시 양성이 나오면 계속 격리를 해야 할까, 과연 감염력을 갖고 있을까'라며 토론이 있었습니다. 바이러스는 통상 몸속에서 2주 이상 못 버팁니다. 그 안에 항체가 생기게 마련이니까요. 항체가 생긴 몸속에 잔존한 바이러스는 진단 검사에서 양성으로 나와도 감염력은 거의 없다고 봅니다."

―환자의 입장이 되니 간호사가 어떻게 보이던가요?

“간호사들이 너무 고마웠어요. 저는 제가 돌봤던 환자들을 떠올렸어요. 어떤 이들은 갇힌 상태에 분노했고, 간호사를 상대로 화를 냈지요. 종일 대화할 사람도 없고 얼마나 답답했겠나. 그들은 정말 외로웠겠구나. 누군가 아프면 다정한 말과 위로가 필요하구나. 그때 좀 더 다독거려줬으면 좋았을 텐데, 저희도 바빴기 때문에…, 그게 후회가 됐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