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일 오전 서울 중구 서울시청 앞 광장에 차려진 고 박원순 서울시장의 시민분향소에서 한 여성이 조문하고 있다.
11일 오전 서울 중구 서울시청 앞 광장에 차려진 고 박원순 서울시장의 시민분향소에서 시민들이 조문을 위해 줄을 서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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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계에서 ‘원순씨’는 ‘페미니스트’와 동의어였다. 문재인 대통령이 ‘페미들의 대통령’이라 불린다지만, 서울대 성희롱 사건부터 일본군위안부 문제, 강남역 살인사건까지 박원순 서울시장 만큼 여성 이슈 현장을 발로 뛰며 응원한 정치인도 드물었다. 그랬던 그가 성추행 사건에 연루돼 극단적 선택을 했다는 소식은 ‘안희정 미투’ 이상으로 충격을 던졌다. 배신감과 연민이 빠르게 교차했다. 서울대 성희롱 사건때 박원순 당시 변호사를 도와 소송을 승리로 이끄는 데 기여한 대학선배는, “죽음을 택한 것이 박 시장의 가장 큰 잘못이다. 잘못했으면 대가를 치르고, 억울했으면 항변하는 것이 지지자들에 대한 예의였다. 언제까지 한국 사회를 생과 사의 싸움으로, 원한과 복수가 되풀이되는 사회로 만들려는가” 탄식했다.

박원순은 분명 한국 시민운동사에 큰 획을 그은 인물이다. 소액 주주 권리 찾기, 국회의원 낙선 운동, ‘아름다운 가게’를 통한 기부 등 참신한 아이디어로 시민사회운동의 새 지평을 열었고 무상급식, 도시재생 등 생활밀착형 시정을 주도해 역대 최초로 서울시장 3선을 기록했다. 그렇다고 해도 박 시장 사후(死後) 이를 추모하고 애도하는 풍경은 웬지 거북하고 불편하다. 서정협 서울시장 권한대행이 10일, “고인의 장례를 서울특별시장(葬)으로 5일간 치르겠다, 별도 분향소를 마련해 시민들이 조문토록 하겠다”고 발표했을 때 많은 국민들은 어리둥절해했다. 고인의 죽음이 시장 업무를 수행하다 이뤄진 순직이었던가. 그는 함께 일했던 비서가 성추행 피해 고소장을 경찰서에 제출한 다음날 극단적 선택을 했다. 엄중한 코로나 시국에 서울시가 앞장서 5일장에 분향소까지 설치하는 것이 적절하냐는 논란도 거셌다. 교회 소모임이 금지되고, 일반인 장례도 조문을 사절하는 마당이다. 10일 청와대 국민청원 게시판에 올라온 서울특별시장(葬)을 취소하란 청원이 삽시간에 20만을 돌파한 것은, 박원순에 대한 지지 여부를 떠나 그것이 ‘상식’의 문제였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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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인 같은 삶” “천만 촛불광장을 지켜준 고인을 잊지 않겠다”는 여권의 뜨거운 애도 물결에도 대중의 시선은 곱지 않다. 피해자 중심주의, 젠더감수성을 외쳐온 그들 중 고인의 성추행 의혹에 유감을 표명한 사람은 없었다. 장례위원장을 맡겠다는 이해찬 더불어민주당 대표는 고인의 성추행 의혹을 묻는 취재진에게 “그걸 예의라고 묻느냐!”며 되레 화를 냈다. 이들은 설마 죽음이 모든 걸 덮을 수 있다고 믿는 걸까. ‘그까짓 성추행’이 고인을 추모하는 데 걸림돌이 되어선 안 된다는 걸까. “삶을 포기할 정도로 자신에게 가혹한 박원순이 원망스럽다. 노무현·노회찬 동지가 갔을 때 가슴에 큰 구멍이 생겼다면 이제 평생 또 다른 가슴의 블랙홀을 가지고 살아가야 할 것 같다”는 조희연 교육감의 애도는 자살한 정치인들에 유독 관대했던 우리 사회의 정서를 이용한 듯해 더욱 씁쓸했다.

고인에 대한 추모가 장대할수록 피해 여성의 고통은 극심해진다. 실제로 대대적인 2차 가해가 시작됐다. 지지자들은 당시 서울시장의 비서로 근무했던 이들의 명단을 공유하며 피해 여성 찾기에 혈안이 됐다. 엉뚱한 사람의 가짜사진이 벌써부터 돌고 있다. 가장 분노하는 건 현 정권 핵심 지지층인 2030 여성들이다. 안희정 상가에 문대통령 부부가 조화를 보냈을 때 ‘김지은입니다’ 책 구매로 보란 듯이 저항했던 이들은, 온라인에 ‘#박원순 시장을 고발한 피해자와 연대합니다’란 해시태그, ‘어떤 자살은 가해였다. 아주 최종적인 형태의 가해였다’는 정세랑 소설의 문장을 공유하며 피해 여성 엄호에 나섰다. “전례없는 서울특별시장(葬)? 정부가 앞장서 2차 가해를 하겠다는 건가”라는 분노의 목소리가 터져나오고, 정의당 청년대표 장혜영 의원은 “전례없이 행해져야 하는 건 위계에 의한 성폭력 진상파악”이라고 일침했다.

인스타그램 캡처

박원순은 성희롱이 범죄임을 인식시킨 국내 최초의 직장 내 성희롱 소송을 승리로 이끈 주역이다. 당시 고소장에 ‘호숫가에서 아이들이 장난삼아 던진 돌멩이로 개구리를 맞힌다. 아이들은 장난이지만 개구리는 치명적인 피해를 입는다’는 명문(名文)을 직접 썼다. 시장 취임 후 젠더 특보부터 신설했고, ‘안희정 미투’가 폭로됐을 때 “용기 있는 영웅들의 행동”이라고 박수를 보냈다. 다행히도 서울시는 ‘박원순 시정 철학’을 굳건히 지켜나가겠다고 10일 선언했다. 거기에 박 시장의 성평등 철학도 포함되는 거라면, 서울시는 고인의 유언대로 장례는 조용히 치르되 성추행 고소 건은 명백히 소명해야 한다. ‘과거를 기억할 수 없는 사람은 그 잘못을 되풀이할 수밖에 없다’는 박원순의 말을 인용한 한국성폭력상담소의 입장문은 의미심장하다. “박 시장의 죽음이 비통하다면 서울시는 잘못을 되풀이하지 않도록 책임을 다하라” 촉구한 이들은 대대적인 장례와 장례위원 모집, 시민 조문소 설치에 반대했다. 좌파 여성단체들까지 가세한 여론을 외면한 채 ‘공소권 없음’으로 무마할 생각이라면 정의와 원칙, 상식을 그토록 강조해온 현 정권의 지지 기반은 뿌리부터 흔들릴지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