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융감독원이 키코(KIKO) 재배상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분쟁 조정 관련 규정을 지키지 않았다는 지적이 제기됐다. 금감원은 작년 12월 '키코 피해액의 일부를 기업들에 물어주라'고 은행에 권고한 이후 은행들이 "검토 기한을 더 달라"고 요청하자 다섯 차례나 기한을 연장해줬다. 그런데 분쟁 조정 관련 법규에는 검토 기한을 늘릴 근거가 없다는 것이다. 금융권에서는 "금감원의 '키코 재배상' 집착이 규정 위반으로 이어졌다" "금융회사들의 규정 준수 여부를 감독해야 할 금감원이 스스로 신뢰를 떨어뜨렸다"는 비판이 나온다.
◇올해 1월 끝났어야 하는데… 규정 무시하고 끌었나
17일 금융권에 따르면, 금감원의 분쟁 조정안을 수락할지는 조정안이 통지된 이후 20일 이내에 결론 내려야 한다. 이 기간 내에 분쟁 조정 당사자 중 한쪽이라도 수락 의사를 안 밝히면 분쟁 조정은 '조정 불성립'으로 끝난다. 이런 내용은 '금융위원회의 설치 등에 관한 법률 시행령'과 '금융분쟁 조정세칙'에 담겨있다.
금감원은 지난해 12월 12일 분쟁조정위원회를 열어 "키코 피해 기업에 피해액 15~41%를 물어주라"고 결정했다. 같은 달 19일 신한·우리·산업·하나·대구·씨티 등 은행 6곳에 통지했다. 법규상 20일 이내인 올해 1월 8일까지 마무리돼야 했다. 그러나 그때까지 "조정안을 받아들이겠다"고 밝힌 은행은 한 곳도 없었다.
그러자 금감원은 검토 기한을 1개월 늘려줬다. 이후에도 은행이 결정을 미룰 때마다 시간을 더 줬다. 다섯 차례나 기한을 연장한 끝에, 이달 5일 신한·하나·대구은행이 배상 거부 의사를 밝히면서 분쟁 조정이 마무리됐다. 여섯 은행 중 우리은행만 금감원 권고를 받아들였다.
문제는 금감원이 검토 기한을 더 늘려줄 법적 근거가 없다는 것이다. 분쟁 조정 관련 시행령·세칙은 '20일 내에 결론을 내려야 한다'고 못 박고 있다. 그런데 이런 법규가 키코 분쟁 조정 과정에서는 무시됐다는 지적이다.
금융권에서는 은행들이 답변을 피하는 방식으로 키코 배상 거부 의사를 전달했다는 해석이 나온다. 은행들은 지난 2013년 대법원 판결로 키코 문제가 마무리됐고, 민법상 손해배상청구권 소멸시효(10년)가 지난 현재 조정안을 수용하면 배임에 해당할 수 있다고 봤다. 그렇다고 금감원 권고를 대놓고 거부하는 건 눈치가 보여 우회적으로 뜻을 밝혔다는 것이다. 금융권 관계자는 "만나자는 연락을 무시해도 계속 '언제 만날 거냐'고 물어보는 사람 같다"고 했다.
금감원 관계자는 "법규에 검토 기한을 늘려줄 근거가 분명치 않은 건 맞고, 향후 규정을 고쳐 명확히 할 것"이라면서도 "지난 2016년 '자살 보험금 사태' 등 과거에도 기한을 늘려준 사례가 있다"고 했다. 분쟁조정 당사자가 수락기한을 늘려다라고 요청할 땐 연장해주는 게 분쟁조정 제도의 취지에 부합하며, 외부 법률검토에서도 "민사 원칙상 당사자의 의사에 따라 기한을 늘려주는 건 문제가 없다"는 판단이 나왔다는 것이다. 한 시중은행 관계자는 "키코 배상 문제가 복잡해 20일 내 결정이 어려운 건 맞는다"면서도 "윤석헌 금감원장의 관심 사안이 아니었다면 이렇게까지 했을지 의문"이라고 했다.
◇협의체 만들어 '키코 배상 2라운드' 추진하겠다는 금감원
대다수 은행이 금감원 분쟁 조정안을 명시적으로 거부했지만, 금감원은 '키코 재배상'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있다. 금감원은 지난 10일 기자간담회에서 "은행들이 대승적 차원에서 전향적으로 (키코) 조정안을 수락하기를 바랐으나 대부분 불수락하여 아쉽다"면서 금감원 분쟁 조정위 심판대에 오르지 않은 기업(145곳 예상)에 대한 자율 배상을 논의할 협의체를 꾸리겠다고 밝혔다. 이달 말부터 본격 가동될 전망이다. 그러나 금융권에서는 회의적인 반응이 많다. 대다수 은행이 키코 배상 거부 의사를 밝혔고 배임 우려는 여전하기 때문이다. 더구나 이번 협의체에서는 피해 기업이 자체적으로 배상 근거를 찾아야 한다. 금감원은 분쟁조정위 논의 내용을 설명해주는 등 간접 지원에 그친다. 금감원 관계자는 "쉽지 않다는 건 알지만 은행이 판단해 금감원 권고 배상 비율(피해액 15~41%)보다 낮은 액수를 배상해줄 가능성은 있다고 본다"고 했다.
☞키코 (KIKO·Knock-In Knock-Out)
환율이 일정 범위를 벗어나지 않으면 만기에 미리 정한 환율로 외화를 팔 수 있는 파생 금융 상품. 예컨대 만기 시 환율이 달러당 1000~1200원이면 1100원에 달러를 팔 권리(옵션)를 부여하는 식이다. 그러나 환율이 미리 정한 범위를 벗어나면 가입자가 크게 손해 보는 구조다. 2008년 글로벌 금융 위기 때 환율이 급등하면서 수출 기업들이 큰 손실을 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