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광화문 북측 광장에 8m짜리 거대 정육면체가 들어섰다. 각 면이 한글과 달항아리 문양으로 장식돼있다. "한글은 자모(字母)가 모여 호흡이라는 생명의 행위를 통해 의미가 된다. 달항아리는 위아래를 따로 빚어 붙인 뒤 불을 통과해야만 온전한 그릇이 된다. 한글과 달항아리는 우리 민족의 키워드와 같다. 나뉘어 있지만 하나가 될 수밖에 없는 숙명을 내포하고 있다."
6·25전쟁 발발 70주년을 맞아, 유명 설치미술가 강익중(60)씨가 대형 조각품 '광화문 아리랑'을 선보인다. 국가보훈처 의뢰로 작품 제작을 맡은 강씨는 "가장 한국적인 유산을 통해 전쟁의 시간을 상기시키고자 했다"며 "전시 장소로 광화문 앞을 택한 이유는 과거와 현재의 교집합이자 미래로 열린 문(門)의 장소이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20년간 달항아리와 한글을 작품 소재로 다뤄온 강씨는 어린이들과의 협업 프로젝트로도 국제적 명성을 얻은 작가다. 이번 작품을 위해 한국과 유엔 참전 22국 어린이 1만2000명의 '꿈' 그림을 수집했다. 해외한국문화원 등의 협조로 모은 손바닥 크기(3인치) 그림으로 달항아리 형상의 내부를 채웠다. 그림에는 참전용사에게 보내는 감사 인사뿐 아니라, 전쟁이 멈춘 곳에서 피어난 최신의 소망이 담겨있다. "갖고 싶은 스마트폰, 식품공학기술자 등이 그려져 있다. 그림을 보면 10년 뒤의 세상이 어느 정도 보인다. 일종의 빅데이터다. 이들의 개별적 바람이 하나의 작품이 되는 과정을 통해 우리가 연결돼있음을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작품 제목에서 드러나듯, 또 다른 주요 모티프는 아리랑이다. 알록달록 크레파스 글씨로 적어 넣은 경기아리랑·밀양아리랑·정선아리랑·진도아리랑 등의 가사를 가로·세로 30㎝ 패널에 한 글자씩 인쇄해 각 면의 달항아리 둘레를 채운 것이다. 패널을 잇는 졸대 위에는 6·25전쟁 전사자 17만5801명의 이름을 넣었다. 한국인은 한글, 외국인은 영어로 적었다. 김구봉, 김구석, 김구선, 김구성, 김구수…. "순국 장병들과 함께 아리랑을 부르듯 연출하고 싶었다. 아리랑은 한(恨)의 노래지만, 한의 극복을 위한 노래이기도 하다." 작품은 15일 개막식부터 30일까지 누구나 제한 없이 관람할 수 있다.
정육면체는 위아래가 절반으로 나뉘어 있고, 윗부분이 맷돌처럼 70초(70주년을 상징)마다 회전한다. 해프닝도 있었다. "발전기를 동원해 상단이 시계 방향으로 돌면서 분리된 달항아리 문양이 70초에 한 번씩 맞물리도록 설계했다. 역사의 흐름을 보여주려는 의도였다. 그런데 그저께 점검 도중 그 역사의 흐름이 거꾸로(시계 반대 방향) 가고 있더라. 부랴부랴 설비를 손보고 방향을 바로잡았다."
미래 지향적 작품과는 별개로, 강씨는 2015년부터 실향민들의 꿈 그림도 모으고 있다. 통일부 협조를 구하거나, 이북5도민회 체육대회 등을 다니며 그림 4000여장을 모았다. "어르신들의 꿈은 대체로 추억이다. 어린이들은 미래를 상상하면서 현재를 바라보는데, 노인들은 과거를 통해 현재를 이해한다. 가장 큰 차이다. 한 할아버지께 그림을 부탁드렸더니 통일되면 고향집 구들장 밑에 숨겨놓은 스케이트를 찾아야 한다고, 자식들에게 스케이트 꼭 가져오라는 메시지를 종이에 쓰시더라. 대부분 자기 그림을 보면서 운다. 나는 이들의 기억도 보존돼야 할 문화재라고 생각한다." 이들의 그림을 모은 책 '그리운 내 고향'도 올해 출간될 예정이다.
강씨는 6·25전쟁 당시 '유모차 공수작전'에서 영감을 얻은 벽화 'Kiddy Car'를 최근 완성해 평택 미군기지에 기증했다. 1950년 12월, 연합군의 서울 퇴각 결정이 떨어지면서 미군 러셀 블레이즈델 중령이 15시간 만에 한국인 전쟁고아 1000여 명을 제주도로 옮긴 긴박한 작전을 기린 작품이다. "2년 전 이 이야기를 처음 듣고 너무 감명을 받아 지난해부터 작업을 진행했다. 고아들을 수송한 비행기 형상을 벽면에 그린 뒤 그 위에 미군기지 내 초등학교 학생 1000명의 꿈 그림을 모아 붙였다." 지난 8일 기증식이 열렸고 "양국 동맹 강화에 힘써줘 감사하다"는 내용의 감사패를 받았다. 강씨는 "전쟁이 남긴 상처뿐 아니라 우리가 받은 도움의 손길 역시 잊어선 안 된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