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0년 한반도 하늘에서는 끊임없이 종이가 쏟아졌다. 태극무늬 새긴 철모를 쓴 군인이 땅바닥에 쓰러진 중공군으로 보이는 병사의 목을 짓밟으며 총구를 겨누는 그림. 이렇게 적혀 있었다. ‘평화의 십자군 앞에 침략자의 운명은 이렇다’. 종이 폭탄이라 불리는 ‘삐라(전단)’였다.

한반도 삐라의 시작은 6·25전쟁 때로 본다. 국방부 등에 따르면 6·25 기간 미군은 수억 장에 달하는 삐라를 수송기나 폭격기를 통해 한반도 전역에 투하했다. 프랭크 페이스 당시 미국 육군장관은 "적을 종이(삐라)로 묻어버리라"고 말할 정도였다. 한국어와 영어뿐만 아니라 중국어로 된 삐라도 뿌렸다. 북한 역시 마찬가지. 무차별 투척이었다. 합동군사대 이윤규 명예교수는 "당시 삐라는 상대방을 일방적으로 비방하는 데 초점이 맞춰져 있었기 때문에 내용 자체는 설득력이 크지 않았다"면서도 "삐라가 적군의 심리를 흔들어 전쟁에 끼치는 영향이 그만큼 컸기 때문에 양쪽 모두 전력투구한 것"이라고 말했다.

6·25 발발 이후 벌써 70년이다. 박물관에나 어울릴 듯한 이 종이 폭탄이 2020년 한반도 정치의 중심에 다시 등장했다. 북은 삐라를 구실로 남북 간 통신선을 모두 차단했다. 그러자 남한 정부는 지난 11일 삐라를 살포하는 민간단체 관계자들을 교류협력법, 항공안전법, 공유수면법 위반 혐의로 경찰에 수사 의뢰했다. 또 단체의 설립 허가를 취소하기 위한 절차에도 들어갔다. 현행법을 '탈탈' 털어 북한 달래기에 나선 것이다

핵과 IT의 시대에 한낱 종이 한 장의 위력이 이 정도였던가. 100원짜리 고무풍선에 매달려 휴전선을 넘었던 삐라는 이제 드론에 실려 평양 상공에 떨어질 정도로 진화했다. '아무튼, 주말'이 삐라의 변천사를 들여다봤다.

2018년 5월12일 새벽, 경기도 파주시에서 자유북한운동연합 관계자들이 삐라 15만장, 1달러 지폐 1000장, 소책자를 담은 USB 1000개 등을 대형 비닐 풍선 5개에 매달아 날려보내고 있다.

70년대 전 北이 8대2로 더 뿌려

삐라 제작에 참여한 전직 합참 관계자 등에 따르면 1960년대부터 1980년대까지는 북한이 남으로 내려 보내는 양이 그 반대보다 8대2 정도로 많았다고 한다.

북이 남보다 경제적으로 우월하다는 자신감이 깔려 있었다. 당시 북한이 보낸 삐라는 자기들의 나라가 실업자와 거지, 세금이나 학비, 치료비 걱정 없는 지상천국이라고 주장한다. 또 월북(越北)한 남한 군인이라며 이들이 평양의 놀이공원이나 사찰에서 휴식을 즐기는 사진을 삐라에 담았다. 경제력을 과시하고, 남한 주민들이 삐라를 읽도록 삐라에 미국 달러를 붙여서 남으로 보내기도 했다. 이 시절 유년 시절을 보낸 세대라면 기억할 것이다. 뒷산이나 골목길에서 주운 북의 삐라는 불온선전물인 동시에, 연필이나 공책을 받을 수 있는 요술방망이였다.

진용선 정선아리랑연구소장은 "1970년대에 강원도 정선에서 유년 시절을 보냈는데, 북한이 뿌린 삐라가 하도 많다 보니 파출소에서는 삐라를 가져오면 공책이나 연필, 자를 선물로 줬다"고 말했다.

북한이 남한보다 삐라를 날려보내기에 훨씬 유리한 환경이라는 점이 북의 삐라 살포를 부추겼다는 분석도 있다. 한반도에서 남으로 부는 바람(북풍)이 연중 약 200일이라면, 북으로 부는 남풍은 약 90일(6~8월) 정도다. 두 배가 넘는 것이다.

남북한 국력 역전되자, 삐라도 역전

1980년대 이후 남한의 경제력이 가파르게 성장하고 국력이 역전되자 삐라를 둘러싼 상황도 변했다. 남한은 1990년대 중반부터는 삐라를 '비방'에서 '팩트' 위주로 바꿨다. 백화점이나 대형 마트 풍경, 김대중 대통령과 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이 정상회담에서 포옹하는 장면 등을 담은 삐라가 북에 뿌려졌다. 당시 국방부에서 일했던 한 인사는 "1990년대 이후 체제 경쟁은 사실상 끝났기 때문에 팩트를 나열하고, 북한 주민에게 뉴스를 제공하는 게 훨씬 더 효과가 있다고 판단했다"고 말했다. 남한은 화장품, 담배, 시계, 콘돔 등도 삐라 풍선에 함께 담아 북으로 날려보냈다.

반면 북한이 보내오는 삐라는 눈에 띄게 줄었다. 김영삼 정부 시절에는 김 대통령과 여배우의 침실 사진을 합성하는 등 남한 체제와 대통령 비난에 열을 올렸다. 하지만 체제 경쟁에서 뒤처지자 실효성이 떨어진다는 판단에 따라 삐라 살포 횟수를 크게 줄였다.

정부 중단하자 민간단체가 살포 나서

2004년 남한은 정부 차원의 대북 삐라 살포를 공식 중단했다. 남북이 서해상 우발적 무력 충돌 방지·전단 살포 금지 등에 합의하면서다. 이때부터 남한에서는 탈북자 출신 인사들이 주축이 돼 삐라를 북으로 날리기 시작했다. 탈북 선교사 출신 이민복 대북풍선단장과 박상학 자유북한운동연합 대표 등은 주로 김정일·김정은 부자 비판에 초점을 맞췄다. 삐라에는 ▲6·25는 김일성이 일으켰으며 ▲김정은의 생모 고용희가 재일교포 출신이고 ▲남한의 경제력이 북한을 압도한다는 점 등을 담았다. 또 북한 주민들이 쉽게 이해하고 믿게 하기 위해 탈북자 개인의 탈북 스토리를 묘사했고, 내용에는 김정일·김경희의 러시아 이름인 '유라' '슈라' 같은 표현을 썼다. 삐라를 날리는 풍선에는 미국 달러·북한 돈을 함께 담았고, 김정은 암살을 소재로 한 영화 '디 인터뷰(The interview)'를 저장한 USB나 SD카드도 포함됐다. 반대로 북한은 2000년대 이후 남북 관계가 악화할 때 종종 남한에 삐라를 보냈다. 주로 주한미군 철수나 남한 좌파 세력을 옹호하는 문구 등을 담았다. 하지만 삐라의 디자인이 조잡해 그다지 눈길을 끌지 못했다.

①과거 김정일이 북한 지도자이던 시절, 남한 탈북 단체들이 만든 삐라. 김정일 독재를 비판하고, 6·25 전쟁이 김일성의 명령에 따라 발발했다는 등의 내용이 담겼다. ②1990년대 북한이 남한으로 날려보낸 삐라. 김영삼 당시 대통령을 ‘파쇼’ ‘동족대결 미치광이’라고 표현했다.

통제된 북한에 침투한 삐라는 치명적

전문가들은 북한이 외부로부터 완전히 봉쇄된 국가이기 때문에 삐라가 상대적으로 효과적이라고 분석한다. 합동군사대 이윤규 명예교수는 "김정은 생모가 재일교포라는 사실 등 북 정권의 아킬레스건을 일반 주민이 알 방법은 사실상 남한에서 보낸 삐라밖에 없기 때문에 북한이 더욱 격렬하게 반응하는 것"이라고 했다. 1990년대 후반 이후 삐라로 인해 골머리를 앓게 되자, 북한은 "남쪽에서 삐라와 함께 보낸 라면 같은 물품은 세균으로 오염됐고, 접촉하면 피부암에 걸려 죽을 수 있다"고 주민들에게 선전했다. 심지어 삐라를 막기 위해 남북 정상회담을 제안했다는 얘기가 나올 정도였다. 이민복 대북풍선단장은 "북한은 수령이 신격화돼 있고, 6·25는 수령이 한반도 해방을 위해 일으켰다고 교육해 통치해왔는데, 삐라가 살포돼 이를 깨다 보니 이 난리를 치는 것"이라고 했다. 박상학 자유북한운동연합 대표는 "북한 주민들은 중국을 통해 탈북할 수 있다는 사실을 우리가 보낸 삐라를 통해 알게 됐다. 1990년대 원산에서는 많은 주민이 동요했다"고 덧붙였다.

세계 주요 전쟁에 빠짐없이 등장한 삐라

영국의 역사학자 데이비드 웰치는 저서 '프로파간다 파워'에서 "제1차 세계대전 때 적진에 수백만 장 전단을 투하한 사실에서 보듯 지금의 전쟁은 종이(삐라) 전쟁과 함께 시작됐다"고 말했다. 두 차례 세계대전을 거치면서 무기가 급속도로 발달했지만, 그럼에도 삐라는 전쟁의 핵심이었다고 한다. 1차 세계대전에는 6000만장이 넘는 삐라가 유럽에 살포됐고, 2차 대전 당시 연합군은 80억장에 달하는 삐라를 뿌렸다. 당시 미군은 일본을 공격하기 직전, 연합군 공격으로 초토화된 독일 베를린의 시가지 잔해와 연합군에 항복하는 나치 독일군 사진을 일본 주요 도시에 투하했다. 또 '곧 공격에 들어갈 예정이니 대피하라'는 내용의 일본어 삐라를 날려보내기도 했다. 베트남전과 걸프전 역시 마찬가지. 공포와 회유는 현대 심리전의 핵심이다.

일각에서는 일부 탈북자가 삐라를 구실로, 모금을 하는 등 '비즈니스'를 하는 게 아니냐는 주장도 한다. 이에 대해 이민복 대북풍선단장은 "2010년 천안함·연평도 도발이 있었을 때는 후원자가 꽤 있었는데, 문재인 정부 들면서 거의 다 끊겼다"고 말했고, 박상학 대표는 "현재 후원자의 80% 정도는 재외동포이며, 목숨을 내놓고 하는 일이 무슨 비즈니스냐"고 반박했다.

일러스트= 안병현

비닐 풍선에서 드론까지… 삐라 살포법의 진화

한 번 날리는 데 10만원선

삐라는 대형 비닐 풍선에 실려 북으로 날아간다. 삐라 살포에 관여한 전직 관료 등에 따르면 대체로 지름 2.5m에 높이 5~7m 크기의 비닐 풍선에 삐라 뭉치를 매단다. 풍선이 뜰 수 있도록 비닐 안에는 일반 가스통 7개 분량의 수소가 주입된다.

풍선 맨 아래쪽에는 ‘바라스타’라고 불리는 에탄올을 플라스틱 용기에 담아 비닐 풍선 하단에 묶는다. 공중에서 에탄올이 증발하면 풍선이 가벼워지면서, 땅으로 떨어지는 것을 막을 수 있기 때문이다. 타이머 역시 풍선 아래쪽에 달아 일정 시간이 되면 풍선에 묶인 끈이 풀리며 삐라 뭉치가 풍선과 분리되도록 했다.

삐라 풍선은 3000~5000m 상공에서 이동한다. 이 구간의 바람과 속도가 삐라의 운명을 결정한다. 합참에서 근무했던 한 인사는 “만약 250㎞ 정도 떨어진 함경남도 흥남이 목표고, 풍속이 50㎞ 정도 된다고 하면 타이머를 5시간으로 맞춘다”고 했다. 90년대 정부는 한 달 평균 30종의 삐라를 만들어서, 1년에 3억장 정도 뿌린 것으로 알려졌다.

탈북 선교사 출신 이민복 대북풍선단장이 전단을 날리는 데 쓰는 타이머. 개당 약 1000원인 이 타이머를 중국에서 산다고 했다.

현재도 비슷하다. 다만 에탄올 대신 선풍기 타이머에 끈을 묶은 뒤, 시간이 지나 타이머가 돌아가면 끈이 풀리도록 했다. 이민복씨의 경우 3시간까지 조절할 수 있는 선풍기 타이머를 중국 닝보(寧波)에서 구입해 삐라 풍선에 매달았다. 한국 돈으로 1개당 1000원 수준이라고 한다. 이씨는 “서로 다른 세 개의 타이머에 한 시간 간격으로 묶어서 세 개의 삐라 풍선을 경기 북부에서 날리면 휴전선 부근에 있는 인민군 진지, 황해도 사리원, 평양까지 한 시간 간격으로 떨어지도록 할 수 있다”고 말했다. 삐라를 한 번 날리는 데 10만원(인건비 포함)이면 가능하다고 한다.

기술이 발전하면서 드론을 이용한 방식도 등장했다. 자유북한운동연합 박상학 대표는 지난 4월 지름 2m 크기의 드론에 삐라를 매달아 날려 평양에까지 보냈다고 주장했다. 드론에는 무게 5~6㎏인 삐라 7000여 장을 매달았다. 박씨는 오는 25일 6·25전쟁 70년을 전후에 다시 한 번 드론을 날려보낼 예정이다. 박씨는 “4월에 처음 날려보냈을 때는 드론이 평양에 떨어지는 바람에 완전히 성공하지 못했지만, 성공할 경우 드론은 다시 돌아오기 때문에 계속 쓸 수 있는 장점이 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