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나리오 쓰고 처음엔 충무로 선수들한테 안 보여줬어요. 보여주면 분명히 고치라고 할 것 같아서요."
연기 경력 33년 차 배우 정진영(55·사진)이 직접 쓴 시나리오로 신인 감독이 됐다. 18일 개봉하는 영화 '사라진 시간'은 시골 마을에서 벌어진 화재 사건을 수사하는 형사 박형구(조진웅) 이야기다. 평범한 형사물이겠거니 하고 보기 시작한 영화는 뒤통수를 세게 때린다. 화재 사건으로 출발한 이야기는 우리가 사는 세계와는 다른 차원의 평행 세계로 이어지며 '나는 누구인가?'라는 답 없는 질문을 던진다. "엇갈리는 평을 각오하고 만들었다"면서도 신인 감독의 손은 연신 떨렸다.
'왕의 남자' '7번방의 선물' '국제시장' '택시 운전사'까지 네 편의 천만 영화에 출연했다. 드라마 '화려한 유혹'의 주연으로 호평받은 4년 전, 영화감독에 도전하기로 결심했다. "그때 아들이 고3이었어요. 그동안은 가장으로 사는 게 제일 중요한 의무였는데, 이제 애를 다 키웠다고 생각하니 '나는 누구지?' 돌아보게 되더라고요. 어린 시절 꿈꿨던 예술가는 힘들고 외롭더라도 도전하는 존재였는데, 나는 안전한 시스템 안에서 안주하는 것 같고."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이 영화 전체를 관통한다. 화재 사건을 수사하던 형사 박형구는 하루아침에 삶이 송두리째 뒤바뀌고 자신이 생각하는 '나'와 남들이 규정하는 '나' 사이에서 괴로워한다. 정해균·장원영 등 관록의 배우들이 의뭉스러운 마을 주민을 연기해 자칫 무거워질 수 있는 영화에 코믹한 리듬감을 불어넣는다. 뒤늦은 도전을 하며 "훌륭한 감독은 많으니 나는 새롭고 이상한 것을 하자"고 마음먹었다. 정진영은 미스터리·코미디·판타지를 넘나드는 자신의 영화를 "굳이 따지자면 슬픈 코미디에 가깝다"고 소개했다. "불필요한 자극이나 충격은 주고 싶지 않았어요. 촬영 감독한테도 부족해 보일지라도 거칠고 현란한 영상은 피하자고 부탁했죠."
서울대 국어국문학과 출신인 그는 서른 중반, 이창동 감독의 영화 '초록 물고기' 연출부 막내로 일하다 단역 대타로 출연하며 영화배우의 길을 걷게 됐다. 이준익 감독의 영화 '왕의 남자'에서 연산군 역으로 연기력을 인정받으며 이름을 알렸다. 그는 "연출을 하게 될 줄 알았다면 감독님들을 잘 봐뒀을 텐데 그러지 못해 후회됐다"면서 "감독이 무슨 일을 하는지도 모르고 무작정 덤벼들었다"고 했다. 영화를 만들며 이준익 감독의 조언도 구했다. "처음엔 아직 미완성이라고 숨기다가 뒤늦게 감독님께 시나리오를 건넸어요. '좋다. 잘 썼다' 하시더니 '그런데 분명 논란의 여지가 있으니 그건 네가 감당해야 한다' 하셨죠."
두루 좋아할 만한 영화는 아니지만, 낯설고 새로운 영화를 원한다면 오래 곱씹어 볼 수 있는 영화다. 9일 언론 시사회에서 배우들이 "쫑파티 때까지 '이게 뭐지?' 싶은 영화였다"며 농담하기도 했다. 정진영은 "선문답을 던지는 영화"라면서 "끝나자마자 해석이 되는 영화가 아니라 사유의 질료(質料)가 되는 영화이길 바란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