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염병, 역사를 흔들다 마크 해리슨 지음 | 이영석 옮김 | 푸른역사 680쪽 | 3만5000원

1844년 11월 영국의 데번포트를 출발해 아프리카로 갔던 소형 증기함 에클레어호가 이듬해 9월 귀환했을 때, 생존 승무원은 3분의 1도 되지 않았다. 대서양 케이프베르데 군도에서 황열병에 희생된 것이다. 영국에서 21일 격리 조치를 당하는 동안 더 많은 선원이 감염됐다. 주요 전염병이 증기선을 통해 퍼진 첫 사례였다. 세계가 막 배와 철도를 통해 하나로 연결되던 새로운 전환기에 ‘어떻게 그런 체제와 양립할 수 있는 위생 제도를 고안해 내느냐’는 도전이 나타나게 됐다. 저자는 의학사를 전공한 영국의 역사학자다. 12년 연구의 결실인 이 책은 여섯 대륙에서 700년에 걸쳐 일어난 인간과 전염병의 투쟁을 살핀다. 전염병이 그저 ‘의학 역사’ 분야의 에피소드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때론 역사의 급격한 변화에서 영향을 받고, 나아가 역사 흐름을 바꿔 놓기도 했다는 것이다. 정말 그랬나? 19세기 대규모 국제무역과 노동 이주가 콜레라와 황열병을 확산시켰고, 일개 국가의 힘으로 전염병에 대처하기 어렵게 되자 새로운 국제 공조 시스템이 생겨났다. 1907년 파리에 전염병 담당 상설 기구인 국제공중보건국이 생겨났는데, 바로 세계보건기구(WHO)의 전신이다. 저자는 한국어판 서문에서 “코로나19 이전 수십 년간 전염병의 영향력이 상대적으로 미미했던 탓에 인류가 이 문제를 고심하지 않았던 것”이라며 “코로나 이후 새로운 국제 규범을 만들지 못한다면 탈세계화와 자유의 잠식이 일어나는 암울한 미래를 맞게 될 것”이라고 경고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