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량신(杜良臣) 무리의 행위에 분노가 치밀어 말을 빨리 달리니, 진흙탕에 말이 빠지고 밤이 되어 어두워도 오히려 그 고통을 알지 못하였습니다."

1608년(광해군 원년) 명나라에 사신으로 갔던 최현(1563~1640)이 남긴 조천일록('朝天日錄')의 한 대목이다. 명의 관리 두량신은 일찍이 사신으로 조선에 왔을 때 '양심이 전혀 없고 비루한 관리'('선조실록')로 기록된 인물. 끝없이 뇌물을 요구하는 그에게 시달리다 겨우 놓여난 최현은 '분노의 질주'로 화를 달랬다. 임진왜란 때 의병으로 공을 세웠던 최현은 훗날 부제학, 강원도 관찰사를 지냈다.

숭실대 한국기독교박물관 소장 '연행도' 중 조공(朝貢) 장면. 조선 사신들의 중국 사행길을 묘사한 14폭짜리 작품의 일부다.

조규익 숭실대 교수 팀이 최근 펴낸 '역주 조천일록'과 '조천일록 세밀히 읽기'는 굴욕으로 가득했던 명나라 사행(使行)의 풍경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최현은 1608년 8월 3일 출발해 이듬해 3월 22일 귀국 보고를 할 때까지 하루도 빠지지 않고 상세한 기록을 남겼다. 홍대용·박지원 등이 남긴 연행록보다 앞서지만, 다녀온 지 150여년이 지난 뒤에야 간행돼 최근까지 학계에도 거의 알려지지 않았던 자료다.

인삼, 백미, 미역, 칼. 붓, 먹, 활…. 압록강을 건너는 순간부터 길목마다 바쳐야 했던 뇌물의 명세가 끝없이 이어진다. 명나라 관리들은 품질을 트집 잡아 더 많은 물건을 뜯어내는가 하면 대놓고 은(銀)을 요구했다. "더러워 침을 뱉지 않을 수 없었으나 물품을 보냈다." "공사 간의 노잣돈을 기울여 (뇌물로) 나눠 주니 소요된 비용은 가늠할 수 없을 정도였다." 북경에 당도해도 끝이 아니었다. "칙서를 받을 때 궐내의 관원이 전례에 따라 인정(人情·뇌물)을 요구하였다. 주지 않으면 심하게 모욕을 당하기 때문에 은 석 냥과 부채 등을 주었다."

최현이 중국에서 본 것은 일부 관리의 비행이 아니라 중화(中華) 질서의 붕괴 현장이었다. 저물어가는 제국의 횡포에 속수무책 당할 수밖에 없었던 조선 사신들의 굴욕과 비애가 생생하다. 조 교수는 "최현은 중세 보편주의의 근원인 명나라가 처참히 무너지는 모습을 보여줌으로써 조선에 경각심을 일깨우려 한 것으로 보인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