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종호 풍월당 대표

잘 알려진 이탈리아 칸초네 중에 ‘돌아오라 소렌토로’가 있다. 학창 시절 한 번쯤 불러보았거나 들어보기라도 했을 것이다. “아름다운 저 바다와 그리운 그 빛난 햇빛, 내 맘속에 잠시라도 떠날 때가 없도다…. 돌아오라 이곳을 잊지 말고. 돌아오라 소렌토로.” 1905년에 만들어진 이 노래는 다만 사랑 노래일까? 미국으로 떠났던 많은 이탈리아 이민자가 고향을 그리는 노래이기도 했다.

19세기 말 유럽의 산업화 경쟁에서 뒤처진 지역이 이탈리아 남부였다. 일자리도 없어 가난하던 그들에게 미국은 꿈을 이룰 수 있는 낙원으로 비쳤다. 그렇게 많은 젊은이가 가족을 남긴 채 나폴리 부두에서 뉴욕행 배에 올랐다. 아메리칸 드림을 찾아 1880년부터 시작된 미국 이민은 그 수가 폭증해 1924년 미국 이탈리아 이민자는 500만명을 넘어섰다. 지금 맨해튼에 있는 리틀 이탈리도 그때 형성된 동네다. 그들은 돈을 벌어 집으로 돌아가는 것이 목표였지만 두 차례 세계대전이 이어지면서 고향에 가기가 어려워졌다. 그런 그들에게 '돌아오라 소렌토로'는 바로 자신들의 노래였다. 그 노래를 불러주는 테너는 그들과 같은 배경에서 나고 자라 미국에서 꿈을 이룬 남자, 카루소였다.

나폴리 빈민가에서 뉴욕 메트까지

엔리코 카루소(Enrico Caruso·1873~ 1921)는 나폴리 빈민가에서 노동자 아들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아버지를 따라다니며 공사장에서 일했다. 군 복무를 마친 후에야 뒤늦게 노래를 자신의 직업으로 정했다. 24세에 나폴리의 극장에 섰지만 정상적인 음악 수업을 받은 적이 없었던 그는 실패했다. 하지만 좌절하지 않고 뼈를 깎는 노력을 경주했고 결국 서른이 되기 전에 국제적으로 이름을 날렸다.

1903년 뉴욕의 메트(메트로폴리탄 오페라)가 그를 초청하면서 카루소는 경제 대국 미국을 배경으로 20여년간 메트에서 군림하게 된다. 그가 출연하는 날이면 일과가 끝난 이탈리아 이민자들은 떼를 지어 메트로 달려갔다. 그들은 조국의 노래를 들으며 울고 조국의 스타를 보며 웃었다. 카루소는 이탈리아인의 타향살이를 달래주는 최면제였다. 그는 메트 공연에 863회 출연했다. 또한 떠오르던 레코드 산업의 총아가 되어 음반을 266종 발매했다. 음반 판매량은 총 6000만장에 달했다.

①1910년 뉴욕 메트로폴리탄 오페라가 초연한 푸치니의 '서부의 아가씨'에서 엔리코 카루소(가운데 동그라미 친 사람)가 딕 존슨 역을 맡아 열연하고 있다. ②1905년 당시의 메트로폴리탄 오페라 극장. ③카루소는 생전 마지막 3개월 동안 소렌토의 비토리아 호텔 발코니에서 자신의 고향인 나폴리를 바라다보곤 했다.

성공한 카루소는 최고급 양복만 입었으며 니커보커 호텔의 스위트룸에서 살았다. 기자가 "왜 항상 옷을 차려입는가"라고 묻자, "내가 가장 좋은 옷을 입어야 아이들이 나를 보고 노력할 것이 아니냐"고 대답했다. 그는 이탈리아 식당을 애용하면서 동포들과 떠들고 장난치고 빈민의 우상으로서 역할을 자처했다. 길에서 거지를 보면 최고급 코트를 벗어주었고 호텔방 발코니에서 길 가던 사람들에게 노래를 불러주기도 했다. 식당에서는 영수증 뒷면에 건너편 손님의 캐리커처를 그려 웨이터 웃음보를 터뜨렸고, 호텔이나 극장에서 경비원과 청소부들의 이름을 기억해 부르는 등 따뜻하게 챙겼다. 그는 뉴욕에 살았지만 나폴리의 햇볕처럼 따뜻한 심장을 잃지 않았다. 카루소는 백만장자가 되었으며 그를 관리하는 스태프만 21명이었다. 그는 테너의 거의 모든 배역을 소화했고, 어떤 스타일의 역할도 잘해냈다. 테너의 종류는 그가 죽은 이후 나타난 것이며 모든 타입의 테너가 카루소를 모방했다. 카루소는 10개가 넘는 오페라의 세계 초연 무대에 섰다. 푸치니는 1910년 '서부의 아가씨'를 만들 때 그의 목소리를 염두에 두고 작곡했다. 그러나 그는 '삼손과 델릴라' 공연 중에 넘어지던 기둥에 허리를 맞아 늑막염을 앓게 되고 병은 점점 악화되었다.

카루소는 미국에서 죽기 싫었다. 병든 그가 돌아간 곳은 고향 나폴리가 아니라 노래에 나오는 소렌토였다. 그는 소렌토 절벽 위 비토리아 호텔에 묵었는데 바다 건너 나폴리가 보이는 곳이었다. 황혼이면 발코니에 앉아 나폴리를 바라보았다. 그는 처음 고향 무대에서 혹평을 받았던 기억을 잊지 않았다. 그때 카루소는 "다시는 나폴리에서 노래를 하나 봐라. 나는 나가서 성공할 것이다. 만일 나폴리로 돌아온다면 그것은 스파게티를 먹기 위해서일 뿐이다"라고 결심했다. 그런 절치부심(切齒腐心)이 그를 성공으로 이끌었던 것이다.

호텔 발코니에서 고향 나폴리 바라봐

소렌토에서의 3개월 동안 카루소는 지역을 위해 기부도 많이 했지만 나폴리에서 찾아오는 친척이나 옛 친구는 피했다. 자신을 내친 가난한 고향이 미웠다. 하지만 나폴리가 그렇게 보고 싶어서 매일 호텔 방에서 그곳을 바라보았다. 결국 복막염이 왔다. 의사들은 로마의 병원을 예약하고 로마까지 가는 열차를 전세 냈다. 열차를 타기 위해 나폴리의 베수비오 호텔에서 하루 묵게 되었는데, 그날 밤 사망하고 말았다. 그의 나이 48세였다. 그는 그렇게 운명처럼 고향에 돌아와서 죽었고 장례식에서야 비로소 그를 그리워하던 나폴리 사람 수천 명을 만났다.

60년 후 가수이자 작곡가인 루초 달라는 비토리아 호텔의 그의 방(지금은 ‘카루소 스위트’가 돼 있다)을 찾아 묵으면서 칸초네 ‘카루소’를 작곡했다. “바다에서 반짝이는 빛을 보면 미국의 화려했던 밤들이 생각났다네. 그러나 그것은 지나가던 배에서 비친 불빛과 물거품들이었지….” 성공은 물거품이다. 타향에서 이룬 사내의 성공은 어린 시절에 대한 복수다. 그리고 성공해서 돌아와도 고향과 서먹하다. 그는 그곳에서도 이방인일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