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승태 이화여대 명예교수

전 국민에게 공포감을 주는 코로나 사태 속에서도 국민적 감동과 열광 대상이 된 사람들이 있다. 세계적 찬사까지 받는 질병관리본부(질본) 의료진과 방송 경연 대회를 통해 등장한 젊은 트로트 가수들이다.

질본 의료진은 전문 지식과 확고한 직업 정신에 기초한 치밀한 관리와 헌신적 봉사, 차분한 언행으로 국민에게 깊은 감동과 신뢰감을 주고 있다. 언뜻 천편일률적 리듬과 범속한 사랑 타령으로 가득 찬 듯했던 트로트에 숨은 깊은 정서를 표현하는 데 혼신을 다하는 젊은 가수들의 진지한 열정은 고전음악 애호가들도 매료하기에 충분했다. 그들은 현재 대한민국 시민사회 각종 영역에서 발현하는 치열한 프로 정신의 귀감이다. 정치인들의 프로 정신은 어떠한지 살펴볼 필요가 있다. 정치철학의 오랜 주제지만, 코로나 사태라는 국가적 비상 상황에서 그들의 '경연 대회'였던 총선이 끝나고 그들의 활동 무대인 국회가 새로운 개원을 앞둔 시점에 있기 때문이다.

통치권 행사 대상은 경제·문화·교육 등 사인(私人)들 삶의 모든 활동이 하나의 유기체처럼 작동하는 분업 체계인 시민사회다. 따라서 통치권 행사에는 분업 활동에 따르는 협력과 경쟁이나 갈등이 타성에 빠지거나 파괴적이게 되지 않고 새로운 창조와 지속적 번영의 계기로 작동하도록 다양한 수단을 통해 적절히 고무하고 인도하고 통제하는 능력이 필수적이다. 그러한 능력의 핵심은 시민사회에서 발현하는 지식과 담론을 이해하고 변화의 동향을 파악할 수 있는 폭넓은 교양과 깊은 통찰력, 파당 관계를 초월하여 민족사 및 세계사의 관점에서 국가 전체를 통할하고 발전시킬 수 있는 공인 정신과 역사의식이다. 이른바 경륜과 식견으로 불리는 고도의 정신적 경지다. 그러한 경지에 도달하기 위해 얼마나 진지하고 치열하게 노력하느냐에 따라 정치인으로서의 프로 수준이 결정되며, '고단수' 프로 정치인의 다소가 실제로 한 국가의 역량 및 품격의 고하를 결정한다.

우리 정치권에는 경륜과 식견은 아예 논외이고, 국가 통치라는 지엄한 소업(所業)에 대한 외경심도 없이 권력욕과 출세욕만 강하면서 무책임한 선동과 대중의 환심을 사는 언행에만 프로다운 기질을 발휘하는 인물이 너무 많다. 사이비 정치 프로들이다. 그들은 단편적이고 교과서적인 지식을 앎의 전부로 착각하고, 스스로 이해하지도 못하는 이념이나 지키지도 않는 도덕을 강변하며, 대중의 비합리적인 정서나 충동적인 욕구에의 영합을 인간애로 분식한다. 국민 다수가 깨어 있지 못하면 그러한 허구와 위선에 싸인 무정견과 무원칙의 인물들이 언제나 집권층으로 군림할 수 있다.

지난 총선은 국가적 논제도 없이 저급한 정치 언어의 난무 속에 대중 영합의 구호를 선창하는 상급 사이비 프로가 후창하는 하급 사이비 프로에 거둔 거대한 승리다. 의학적 식견에 기초한 질본의 제안을 묵살하고 우왕좌왕한 언행으로 질병을 확산한 책임이 있는 정부 여당은 기묘한 선전·선동으로 과거 정권이 확립해 놓은 의료 제도 및 질본의 공(功)을 자신들의 공으로 둔갑시키는 영특함도 발휘하였다. 그러한 '프로 정신'이 정치적 언어 감각 자체가 부족하고 자중지란과 전략 부재에 빠진 야당의 '아마추어 정신'을 압도했다. 어쨌든 문제는 앞으로의 국가 운영이다.

현재 코로나 사태는 과거 금융 위기와는 차원이 다르게 국내 및 국제적 분업 체계 자체를 위협하고 있다. 시의에 맞는 긴급 처방을 내릴 줄 알면서도 장·단기 국가 목표와 조화를 이루도록 위기 극복 정책들을 입안하고 집행할 통치 역량이 절실한 시점이다. 일시적인 극약 처방으로는 가능할 수 있는 세금 살포도 국가 재정 운용에 대한 장기적 관점은 물론 형평과 효율의 원칙에 따른 정교한 기획과 치밀한 집행이 필요하다. 정부 여당은 나름대로 전문적인 판단으로 반대하는 관계 부처에 대해 합리적인 논박도 없이 무차별적 세금 살포를 무조건 집행하라고 윽박질렀으며, 막상 그 우악스러운 정책에 홀로 정치적 책임을 지기는 두려웠는지 평소의 행태와는 상반되게 야당의 동의를 끌어내는 데 인내와 정성을 다했다. 스스로의 소업에 전문성도 없고 책임감도 없고 자신감도 없는 사이비 프로의 행태다.

시민사회는 통치 대상이지만 새로운 정치 운동의 원천이기도 하다. 프로 정신으로 단련된 대한민국의 시민사회는 사이비 프로 정치인들만이 아니라 이권 및 출세 운동으로 변질한 사이비 시민운동도 감시하고 단죄할 책무가 있다. 나아가 이 나라에 횡행하는 무법(無法)과 졸렬함과 파렴치를 척결하고 국가를 새로운 도약으로 이끌 수 있는 진정한 프로 정치인을 발굴하고 배출해야 할 역사적 소명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