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권 핵심부는 20일 일제히 한명숙 전 총리의 불법 정치자금 수수 사건 재조사를 촉구하고 나섰다. 더불어민주당 김태년 원내대표가 먼저 나서서 재조사를 거론하자, 추미애 법무부 장관이 국회에서 이에 공감하는 발언을 했다. 여권이 일제히 한 전 총리 판결 뒤집기를 시도하는 듯한 모습이다. 대법원에서 유죄가 확정된 정치인의 금품 수수 사건에 대해 집권 세력이 재조사를 요구하는 것은 전례가 드문 일이다.

그런데도 여권이 '한 전 총리 구하기'에 나선 것을 두고 여러 가지 해석이 나온다. 21대 총선에서 177석을 확보한 힘을 바탕으로 '친노(親盧) 대모(代母)'로 꼽히는 한 전 총리에 대한 면죄부를 받아내거나, 특별사면을 해주려는 다목적 포석이 깔려 있다는 것이다. 특히 문재인 대통령은 야당 대표 시절 한 전 총리 사건에 대한 재심 청구 방안을 검토했던 적이 있다. 이 때문에 여권 최고 수뇌부의 의중이 실린 것 아니냐는 관측도 나온다.

5년전 실형 확정 날, 문재인 대표와 한명숙 前총리 - 불법 정치자금 9억여원을 수수한 혐의로 기소돼 대법원에서 징역 2년의 실형을 확정 판결받은 한명숙(왼쪽) 전 국무총리가 대법원 판결이 나온 2015년 8월 20일 국회에서 기자회견을 한 뒤 문재인(오른쪽) 당시 새정치민주연합 대표와 함께 나가고 있다.

김 원내대표는 이날 당 회의에서 한 전 총리에게 불법 정치자금을 준 혐의를 받은 고(故) 한만호씨가 '검찰의 강요로 거짓 진술을 했다'고 쓴 비망록을 거론하며 사건 재조사 필요성을 제기했다. 그는 "이 모든 정황은 한 전 총리는 검찰의 강압 수사와 사법 농단의 피해자임을 가리킨다"며 "한 전 총리는 2년간 옥고를 치렀고 지금도 고통받고 있는데 이제라도 진실을 낱낱이 밝혀야 한다"고 했다. 한 전 총리 사건은 이명박·박근혜 정부 검찰과 양승태 사법부가 합작한 '사법 농단'이란 주장이다.

같은 당 김종민 의원은 이날 국회 법제사법위원회에서 '한만호 비망록'을 언급하며 "국회에서 국정조사나 탄핵을 할 수 있고 법무부 감찰이나 공수처 수사 등을 거쳐 사실관계가 명백히 규명돼야 한다"고 했다. 그는 검찰을 겨냥해 "대통령도 5·18 문제와 관련해 언급했지만 당사자가 고백하는 게 가장 좋은 방법"이라고도 했다. 이에 추미애 장관은 "검찰의 과거 수사 관행에 상당히 문제가 있다고 국민이 이해하고 있다"며 "(한씨) 비망록을 보면 수사기관이 고도로 기획해 수십 차례 수감 중인 증인을 불러 협박·회유한 내용이 담겼다"고 했다.

여권 인사들이 '한명숙 무죄'의 근거로 거론하는 '한만호 비망록'은 한 전 총리 재판에 증거로 제출돼 법적 판단을 받았다. 그런데도 여권이 이 비망록을 근거로 재조사를 주장하고 나온 것은 한 전 총리가 현 여권에서 갖는 상징성 때문이란 시각이 많다. 그는 노무현 정부 때 총리를 지낸 친노 핵심 원로다. 지난 2009년 노무현 전 대통령 장례식 때 추모사를 낭독한 것도 한 전 총리다. 한 전 총리가 2017년 8월 출소했을 때 당시 민주당 대변인이 "추모사를 낭독했다는 이유로 정치 보복이 시작됐다"고 했을 정도로 현 여권 진영에 강한 인상을 남겼다. 한 여권 관계자는 "여권 주류에선 한 전 총리의 순결성이 훼손된 것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분위기와 함께 고령에 옥고를 치른 데 대한 마음의 빚이 있다"고 했다.

한 전 총리는 2015년 8월 서울구치소에 수감될 때 성경과 순결을 상징하는 백합을 들고 나왔다. 당시 새정치민주연합(현 민주당) 의원들이 대거 몰려가 그의 무죄를 외쳤다. 당시 당대표였던 문 대통령은 수감 전날 한 전 총리와 오찬도 했다. 수감 직후에는 참모들에게 재심 청구가 가능한지 검토하라고 지시하기도 했다. 하지만 재심 청구의 실효성이 없다는 판단과 법치 부정 논란 등 여론에 밀려 접었다. 지금도 법조계에선 재심 사유가 되기 어려울 것이란 견해가 많다.

그런데도 여권 지도부가 한 전 총리 사건을 다시 들고나온 것은 177석의 '힘'으로 유죄 판결의 의미를 뒤집으려는 것이란 해석이 나온다. 검찰의 강압 수사 의혹을 부각해 사면 분위기를 조성함으로써 현 정권 주류의 숙원과도 같은 한 전 총리 명예 회복을 도모하려 한다는 것이다. 동시에 '검찰 개혁'의 동력을 마련하려 할 수도 있다. 한 전 총리는 수감 중에도 박근혜 전 대통령 탄핵 직후 민주당 인사들에게 "대선이 끝날 때까지 긴장을 늦추지 말라"는 뜻을 전하고, 문 대통령 당선 직후에는 지인에게 보낸 옥중 편지에서 "바보들이 문재인을 지켜 망가진 나라를 바로 세워달라"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