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소하고 빨래하고 밥 차리며 온갖 집안일을 도맡아 하는데, 남편은 좀처럼 도와줄 생각을 하긴커녕 방으로 들어가 제 할 일만 한다. 분통이 터지는데 어느 날 무거운 걸 들다 근육에 통증이 왔다. 남편이 예전에 얻은 좋은 파스를 기억하고 찾아내 정성스레 붙여 주자 이런 생각이 들었다. '아 맞아, 내 남편은 좋은 사람이지. 순하고 겸손한….'

티격태격하는 젊은 커플 얘기 같지만, 사실 이들은 결혼 53년 차 부부다. 삼성경제연구소 상임고문인 손병두(79) 전 서강대 총장과 전직 교사인 아내 박경자(77)씨는 최근 '부부의 사계절'이란 책을 냈다. 아내 박씨가 쓴 글을 남편 손 전 총장이 편집한 것. "몇 년 전 매일 출근하는 생활을 끝내고 나니 집에서 아내와 함께할 시간이 많아졌지요."(손 전 총장) "코로나 덕에 부대낄 시간이 더 늘어났어요."(박씨)

‘부부의 사계절’을 함께 출간한 손병두(왼쪽) 전 서강대 총장과 아내 박경자씨는 “부부로 함께한 지 반세기가 넘었어도 매일 상대방의 보석 같은 새로운 모습을 발견한다”고 말했다.

박씨는 천주교의 부부 일치 운동인 ME(Marriage Encounter)의 동네 모임 카톡방에 바람직한 부부 관계에 관한 글을 올렸고, 반응이 좋아 책으로까지 내게 됐다. "미켈란젤로의 조각을 '돌 속에 있는 걸작품을 꺼낸 것'이라고 하잖아요? 부부란 상대방 속에 숨어 있는 보석을 찾아 가는 관계라고 할 수 있어요. 50년이 넘어서도요."

두 사람은 1968년 기차에서 옆자리 승객으로 처음 만났고, 손 전 총장은 그날 박씨의 집까지 찾아가 "따님을 제게 달라"고 했다. 하지만 결혼 이후 생활은 그렇게 낭만적이지만은 않았으니, 일에 바쁜 남편은 가정에는 무심한 듯했다. 그가 하루아침에 다니던 회사를 퇴직하고 유학을 떠나자 아내는 홀로 남아 4남매를 키우는 신산한 역정을 걸어야 했다.

세월이 흐른 지금도 아내의 마음에 꼭 드는 남편은 아닌 것 같다. "기찻길 옆에서 자는 것처럼 코를 골고, 부엌 문지방이 38선이라도 되는 듯 넘지 않으니…." 한번은 생선과 누룽지를 차려 놓고 얼른 들라고 불렀는데 남편은 화장실에 앉아 나올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또 휴대폰 들여다보고 있구나!' 짐작하고 화가 났는데, 알고 보니 얼마 전 탈장 수술을 받은 남편이 '볼일'에 집중하고 있었던 것. 박씨는 "제대로 알고 나면 배우자가 아름다워 보일 때가 많다"고 했다. "하느님이 만들어 주신 대단한 작품하고 같이 사는 거라니까요."

오래도록 함께했던 이들이 내린 부부 생활의 포인트는 무엇일까. 박씨는 "상대방을 있는 그대로 지긋이 지켜보는 관조(觀照)가 중요하다"고 했다. "처음엔 '인간 손병두'가 아니라 '내 기준에 끼워 맞춘 손병두'하고 살았던 것 같아요." 그러니 와이셔츠를 세탁기 넣기 전에 얼룩 찾아내듯 단점만 보였다는 얘기다. "그의 장점을 보고, 수난을 인내하고, 감정을 컨트롤하면 즐겁고 행복한 인생으로 바꿀 수 있더군요."

책을 편집하는 과정에서 내내 아내에게 미안했다는 손 전 총장은 "부부 생활이란 서로 모르던 두 사람이 인연을 가꾸며 소모된 에너지를 충전하는 것이기 때문에, 그 관계가 좋으면 가정과 사회, 나라를 행복하게 할 수 있다"고 했다.

아내 박씨가 거들었다. "소통을 안 하니까 숨 막히는 거예요. 이타적으로 살면 세상이 너무나 아름다운데, 그걸 모르니까…." 이혼을 고민하는 젊은 부부들에게는 "부부란 엄청난 노력과 고통을 통해 신뢰를 쌓는 관계고, 기쁨과 환멸은 긴 세월 동안 순환하기 마련"이라는 말을 해 주고 싶다고 했다.

손 전 총장은 폐암 투병 중이던 아내를 돌보기 위해 2007년 이명박 대통령 당선자의 총리직 제의를 고사한 적이 있다. 그는 "월급봉투만 가져오면 내 일은 다 했다고 여기던 젊은 날의 오해를 후회한다"고 했다. 지금도 상대방을 보면 설렌다는 부부는 "매일 배우자의 새롭고 무궁무진한 모습을 재발견하고 있다"고 입을 모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