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일 오전 10시. 충남 천안 삼성SDI 사업장에 낯선 손님들이 찾아왔다. 현대차그룹 정의선 수석부회장과 현대·기아차 연구개발본부 알버트 비어만 사장, 상품 담당 서보신 사장 등이 방문했고,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을 비롯해 전영현 삼성SDI 사장, 황성우 삼성종합기술원 사장 등 삼성의 최고 경영진이 이들을 맞았다. 한국 재계를 움직이는 양대 그룹 수뇌들은 차세대 전기차 배터리인 전고체(全固體) 배터리 개발 현황과 방향에 대해 논의한 뒤, 점심을 함께했다.

국내 1·2위 그룹을 이끌고 있는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과 정의선 현대차 수석 부회장이 13일 충남 천안 삼성SDI공장에서 차세대 전기차용 배터리인 전고체 배터리 개발 등에 대해 의견을 나눴다. 사진은 이 부회장(왼쪽)과 정 부회장이 지난해 1월 2일 서울 여의도 중소기업중앙회 그랜드홀에서 열린 정부 부처 합동 신년 인사회에서 악수하는 모습.

정 부회장이 삼성 사업장을 공식 방문한 건 이번이 처음이다. 재계에서는 "한국 경제 발전 과정에서 끊임없이 경쟁하고 갈등했던 삼성·현대차그룹이 과거를 뒤로하고 더 큰 도약을 위해 협력하겠다는 상징적 사건"이라고 평했다. 급변하는 국내외 경제 상황에 코로나 사태까지 겹친 위기를 새로운 기회로 만들어야 한다는 경영진의 절박한 심정도 반영된 것으로 보인다.

삼성·현대차가 주목하는 미래 배터리

이재용·정의선 회동의 핵심 사안으로 보이는 전고체 배터리는 '꿈의 배터리'로 불리는 차세대 전지다. 리튬이온 배터리의 내부 액체 전해질을 고체로 바꾼 것으로, 과도한 열이나 충격을 받으면 폭발 위험이 있는 기존 배터리와 달리 내부에 인화성 액체가 없어 폭발하지 않는다. 기존 배터리 절반 수준으로 크기를 줄이고 얇게 만들어 구부릴 수도 있다. 이런 장점 때문에 전기차에 전고체 전지를 달면 1회 충전으로 700㎞ 이상을 달릴 수 있다. 조재필 울산과학기술원(UNIST) 교수는 "이르면 5년 후 전고체 배터리를 상용화할 수 있다"며 "전기차에 탑재할 경우 전기차 가격을 낮추고 주행거리를 늘릴 수 있어 전기차 '빅뱅'을 맞이할 수 있다"고 했다. 한 업계 관계자는 "현대차의 전고체 배터리 기술도 상당한 수준"이라며 "현대차가 본격 비즈니스에 앞서 삼성의 기술력을 살펴보려는 일종의 탐색전일 수 있다"고 말했다.

경쟁·갈등의 관계, 도전과 협력으로

이날 이재용·정의선 회동은 삼성·현대차 기업사(史)에서는 '일대 사건'이다. 대한민국 산업 발전을 이끌었던 삼성과 현대차는 '영원한 라이벌'이었다. 사업 영역이 크게 겹치진 않았지만 이병철 삼성 창업주와 정주영 현대차 창업주 때부터 늘 팽팽한 경쟁 관계였다. 1995년 삼성자동차 출범으로 삼성이 승용차 사업에 진출하자, 삼성과 현대차의 갈등 관계는 최고조에 이르렀다. 이후 삼성이 자동차 사업 부문을 르노에 매각한 뒤에도 긴장 관계는 이어졌다. 현대차가 전기차 배터리를 LG화학, SK이노베이션에서만 공급받고, 삼성SDI를 철저히 배제한 데에는 이런 '과거'가 적지 않게 작용했다는 분석이다.

2012년 이 부회장이 유명 자동차 회사인 피아트-크라이슬러의 지주회사 엑소르의 사외이사에 위촉되고, 삼성전자가 미국 최대 전장(電裝) 회사 하만 인수, 자율주행차 조직 신설 등을 할 때마다 현대차는 크게 긴장했다. 2014년 한국전력 삼성동 부지 입찰전에서 두 회사는 또다시 격돌했고, 현대차는 삼성을 의식해 감정가의 배가 넘는 금액을 써내고서야 겨우 낙찰받았다.

최근 삼성은 이 부회장, 현대차는 정 부회장 체제가 굳어지면서 분위기가 달라졌다. 한 자동차 업계 고위 관계자는 "과거 양적 성장 시대엔 국내 라이벌 견제가 매우 중요했지만, 국경과 업종을 넘어선 글로벌 무한 경쟁 시대에는 국내 경쟁 구도가 무의미해졌다는 인식을 3세 경영인들이 갖고 있다"고 말했다. 실제 두 사람은 정 부회장이 이 부회장을 '형'이라고 부를 정도로 가까운 사이다. 이 부회장은 주변 지인들에게 "정 부회장은 훌륭한 경영자이자 멋진 남자"라고 평가했고, 정 부회장은 이 부회장이 수감 생활을 할 때 면회를 가기도 했다.

"코로나 위기 '코리안 어벤저스'로 극복"

배터리·자율주행 등 미래 자동차 기술은 어느 한 곳이 독자 개발하기 어려운 복잡한 기술로, 협업이 필수적인 분야다. 2018년 10월 일본을 대표하는 기업 도요타자동차와 소프트뱅크는 이동(移動) 서비스 사업에서 업무 제휴를 한다고 발표했다. 이 자리에서 도요다 아키오 사장과 손정의 소프트뱅크 회장은 "미래 자동차는 '반도체 덩어리'가 되고, 모빌리티 사회는 AI(인공지능)가 이끌 것"이라며 자동차 기업 도요타와 IT 기업인 소프트뱅크가 협업해야 하는 배경을 밝혔다. 일본은 전고체 배터리 기술도 도요타를 중심으로 한 완성차 업체와 배터리·화학 업체, 그리고 정부가 4자 연합이 돼 연구하고 있다.

한국은 글로벌 기업들이 두루 있는 만큼, 미래 먹거리를 위해 서로 손잡을 필요가 있다는 지적이 계속 있어 왔다. 고태봉 하이투자증권 리서치센터장은 "2025년까지 친환경 차만 44종을 출시하고, 2028년엔 전기로 가는 '도심 항공기' 사업을 하겠다는 계획을 가진 현대차로서는 전고체 배터리 기술 확보가 시급하다"며 "양대 기업 총수의 회동은 '코리안 어벤저스' 출범 가능성을 높였다는 점에서 매우 큰 의미가 있다"고 말했다. 재계에서도 "이재용·정의선 협력이 코로나 이후 대한민국의 새로운 미래를 만드는 희망이 되길 바란다"며 "정부와 정치권도 기업들이 함께 위기 극복을 할 수 있도록 발목 잡기가 아니라 힘 실어주기에 나서야 한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