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각자 진중하라."

1637년 정축년 1월 22일 아버지 인조와 함께 남한산성에 있던 세자가 선언했다. "누가 나라 운명을 굳건히 하겠는가. 나는 동생과 아들이 종사를 받들 수 있으니 내가 죽는다 하더라도 유감이 없다." 소현세자가 인질을 자청하며 협상은 물 흐르듯 진행됐다. 여드레 뒤 삼전도에서 인조가 항복했다.

2월 5일 세자가 왕에게 하직인사를 하고 길을 떠났다. 이들을 데리러 온 홍타이지의 동생 도르곤에게 인조가 말했다. "가르치지 못한 자식이 따라가니, 가르쳐 주시기 바랍니다." 도르곤이 화답했다. "감히 가르칠 입장이 못 됩니다. 황제께서 후하게 대우하시니 염려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인조가 아들에게 일렀다. "지나치게 화를 내지도 가볍게 보이지도 말라." 옷자락을 붙잡고 통곡하는 신하들에게 세자가 말했다. "진중하라." 마침내 세자가 말에 올라 떠났다.(1637년 1월 22일, 2월 8일 '인조실록') 세자는 스물다섯 살, 아내 강빈은 스물여섯 살이었다.

그때 최고사령관 김류가 "같이 끌려가는 내 아들 김경징은 벼슬이 높고 어머니상을 당했으므로 빼 달라"고 청했다. 강화도 수비대장 김경징은 밀려오는 청나라 군사 앞에서 술에 취해 난동을 피워 섬을 내준 자였다. 총융사 구굉이 고함을 질렀다. "네 아들이 세자보다 높은가! 중전 상도 1년(初朞·초기)이  겨우 지났거늘!"('연려실기술'26, 인조조고사본말)

8년 뒤 통곡 속에 떠났던 소현세자와 아내 강빈이 귀국했다. 두 달 뒤 세자가 죽었다. 1년 뒤 강빈이 사약을 받았다. 세 아들은 유배형을 받았다. 아버지 인조는 며느리를 '개새끼'라 불렀다. 조선 왕국을 획기적으로 변화시킬 수 있었던, 한 고위급 부부의 극적이고 불우한 일생 속으로 들어가본다.

고단했던 심양 생활

3월 30일 세자 일행이 압록강을 건넜다. 들판 노숙 여행 끝에 일행은 4월 10일 심양에 입성했다. 그 다음 달 완공된 심양관 관사로 입주를 마치고 세자는 홍타이지를 만났다. 8년 동안 여섯 아이가 태어났다. 딸 하나는 요절했다. 젊은 부부로서 겉은 평이해 보였으나 고된 생활이었다.

경기도 고양시 서삼릉에 있는 소현세자 묘역 ‘소경원(昭慶園)’. 6·25전쟁 무렵까지 남아 있던 정자각은 사라지고 없다. 묘역은 젖소개량사업소 관내라 비공개 구역이다. 병자호란 후 청나라 억류 생활 8년 동안 소현세자는 농장을 경영하고 무역을 지휘해 거금을 모았다. 세자가 살던 심양관은 조선 외교 대표부 역할을 했다. 1644년 오랑캐 청이 사대 본국 명을 멸망시키는 장면을 목도하고 예수회 선교사 아담 샬로부터 서구 문물을 소개받은 소현세자는 이듬해 귀국 두 달 만에 죽었다. 아내 강빈도 죽었다. 아버지 인조는 며느리를 ‘개새끼(狗雛·구추)’라고 불렀다.

심양관은 조선의 무역대표부이자 대사관이었다. 끌려온 포로 송환 협상, 명나라 공격을 위한 징병 요구, 군량미 징발 요구, 공물 숫자와 종류 협상 같은 두 나라 사이 현안은 모두 심양관에서 조정됐다. 청 정부는 세자에게 요구를 수용하라고 우겼고 조선 정부는 왜 요구를 수용하냐고 질책했다. 심양관에서 작성한 일지 '심양일기'와 조선으로 보내는 보고서 '심양장계'에는 세자 부부가 갖가지 질병에 시달린 날들이 자세히 기록돼 있다.

세자는 매월 세 번 열리는 청 황실 아침회의에 참석했고, 황제가 사냥을 떠나면 동생 봉림대군과 동행했다. 아직 살아 있는 명나라 숨통을 끊기 위해 청 정부가 군사를 일으키면 소현세자는 그 전쟁에도 동행해야 했다. 그 가운데 세자의 세계관을 흔든 세 가지 일이 있었으니, 농장 경영과 명나라 현실 목격과 유럽 선교사 아담 샬과의 만남이었다.

세자, 노예 해방 농장주가 되다

1641년 12월 대기근이 휩쓸었다. 청 정부는 심양관에 식량 공급을 중단했다. 대신 1000일을 갈 수 있는 밭을 주며 자급자족하라고 요구했다. 심양관은 "대국(大國)이 소국에게 시킬 일이 아니다"라며 반대했다. 거듭 올라오는 반대에 청 황제는 "그렇다면 450일 갈이 좁은 밭을 준다"고 규모를 줄여버렸다.(1641년 12월 23일 '심양장계') 그러자 소현세자는 심양에 끌려온 조선인들을 주인에게 돈으로 사서 풀어주고 이들에게 밭을 갈게 했다. 속환과 노동력 확보를 동시에 이룬 것이다. 2년 뒤인 1643년 말 심양관은 939일 갈이 농장에 씨앗 233석을 뿌려 곡식 5024석에 목화 620근이라는 엄청난 수확을 거뒀다.(1643년 12월 14일 '심양장계') 심양관은 곡식을 쌓아 두고는 그것으로 진기한 물품과 무역을 하느라 관소의 문이 마치 시장 같았다.(1645년 6월 27일 '인조실록')

전쟁 속에서 현실을 보다

세자와 그 일행이 기록한 '심양장계'는 적나라하다. 명이 망한 이유가 권력자들의 사치라는 사실을 기록하기도 했다. 무엇보다 명 황제의 패악을 있는 그대로 조선에 전하며 대륙에서 벌어지는 일을 똑바로 알리려고 했다. '황제가 술을 좋아해 술주정을 하여 정사가 어긋나는 일이 많다고 한다. 작년에 청나라에서 화친을 위해 사신 셋을 보냈는데 황제가 술에 취해 그들을 죽이라고 했다. 다음 날 그 사신들 행방을 묻는 황제에게 "명에 따라 죽였다"고 하니 사형을 집행한 자를 또 죽여버렸다. 그러고는 청에 화친사를 뽑아 보내라고 명했다. 사람들이 머뭇대자 화친사를 또 목 베어 죽였다.'(1643년 12월 22일 '심양장계')

정자각이 사라지고 없는 소현세자 묘역 ‘소경원(昭慶園)’. 아버지 인조는 아들 묘역을 세자 묘인 ‘원(園)’이라 부르지 말고 그저 ‘묘(墓)’라 부르라고 했다. 소현묘는 고종 때 소경원으로 승격됐다.

세자 눈앞에서 벌어지는 일은 대개 저런 일들이었다. 주자성리학의 나라에서 온 왕자였으니, 소현세자 또한 본능적인 사대주의자였다. 하지만 그가 대명 전투에서 목격하고 전해 들은 소식은 조선에서 배운 바와 너무나도 달랐다. 세자는 물론, 함께 심양 생활을 한 관료들도 느낌은 비슷했다.

사서(司書)로 세자와 동행했던 김종일은 1639년 귀국 후 이렇게 말했다. '군 기강은 엄하고 백성에게는 관대하다. 관리 임명은 능력으로 한다. 이들이 천하를 얻지 못한다고 어찌 장담할 수 있는가(治軍嚴 御衆寬 任人專其所施爲 安知其不得天下耶·치군엄 어중관 임인전기소시위 안지기부득천하야)'(김종일, '노암선생문집'3, 야성문답, 1639)

조선에 피어나는 먹구름

세자는 조선과 청 정부 사이에 앉아 병에 걸려가며 동분서주하고 있었지만, 인조 생각은 조금씩 바뀌어갔다. 세자가 끌려갈 때 동행했던 박황이 1639년 7월 인조에게 넌지시 보고했다. "신이 심양에 있을 때에 어떤 사람이 은밀히 전해 주기를 '성에서 나왔을 때에 왕을 아들로 바꾸어 세우지 않은 것을 후회한다'고 하였나이다."(1639년 7월 14일 '인조실록') 1643년 세자와 봉림대군이 귀국한다는 소문이 들려왔다. 그러자 인조가 이렇게 말했다.

소현세자 유택(幽宅). 비공개 구역이라 찾는 사람이 드물다.

"청나라 사람들이 나에게 입조(入朝·속국 지도자로서 조정에 와서 인사함)를 요구한 적이 있다. 저 나라 사람들이 옛날에는 세자를 지나치게 박하게 대하다가 이제는 오히려 지나치게 후하게 대하니 나는 의심하지 않을 수 없다. 활에 한번 상처를 받은 새는 으레 이런 법이다."(1643년 10월 11일 '인조실록') 어느 틈에 세자는 아들이 아니라 정적으로 변하고 있었던 것이다. 세월이 흐르고, 늙은 아비 눈에 아들은 호랑이로 자라나 있었다.

최고 경영자 부부의 귀국

홍살문에서 바라보는 소경원 전경.

심양 생활 끝 무렵 청나라 섭정왕 도르곤이 명나라 정벌 전투에 소현세자를 동행시켰다. 그때 북경에서 예수회 선교사 아담 샬을 만났다. 대화하고, 수학과 천문학 서적을 선물받고 세자가 그에게 편지를 썼다. "내가 돌아가면 사람들이 황무지와 같은 곳에서 학문의 궁전으로 옮겨져 크게 놀랄 것이다."(아담 샬, '중국포교사', 1672, 안재원, '아담 샬, 순치제, 소현세자', 인간-환경-미래, 2012 재인용) 소현세자 육성이 남은 마지막 기록이다.

그리고 이듬해 마침내 소현세자 부부가 귀국했다. 심양에는 수확한 곡식이 4700석 넘게 남아 있었다. 가져온 재물 가운데 은 1만650냥, 황금 160냥은 강빈 개인 재산이었다. 강빈에게는 강원도 철원에 있는 사찰에 시주한 황금 260냥도 있었다.

광속으로 변화하는 세상을 품고 압록강을 건넜지만 반응은 이상했다. 사람들은 소현세자가 '학문 강론은 전혀 하지 않고 오로지 이재(理財)만 일삼았다'고 했다. 실록은 '북경의 물화(物貨)를 많이 싣고 왔으므로 사람들이 매우 실망했다'고 기록했다.(1645년 3월 9일 등 '인조실록')

사람들을 놀라게 할 지식에 관한 이야기는 없었다. 김종일이 천하를 얻으리라 예언한 오랑캐 나라 정세에 대한 이야기도 나오지 않았다. 그리고 귀국 두 달 만에 세자가 죽었다. 온몸은 시커멓게 변하고 이목구비 일곱 구멍에는 선혈이 낭자했다.(1645년 6월 27일 '인조실록')

아버지의 치사한 기억과 '개새끼'

이상하게도 아버지 인조는 아들 죽음에 적대적이었다. 인조는 세자 관을 왕실 관인 '재궁(梓宮)'이라 부르지 말고 그저 '구(柩)'라 부르라고 했다. 1년상도 7일상으로 줄였다. '원(園)'이라 불러야 할 세자 묘역은 '묘(墓)'라고 격하하라 명했다.(1645년 4월 27일 '인조실록') 며느리 강빈까지 죽였다. 사람들은 이해할 수 없었다. 이듬해까지 사람들이 그 죽음을 안타까워하자 인조가 이렇게 말했다. "개새끼 같은 것을 억지로 임금 자식이라고 칭하는구나(狗雛强稱以君上之子·구추강칭이군상지자)!"(1646년 2월 9일 '인조실록') 인조는 며느리를 '개새끼(狗雛·구추)'라고 불렀다. 실록에 유일무이하게 등장하는 '개새끼'다.

〈다음 주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