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훈 논설실장

씀씀이 헤픈 게 자랑거리인 줄 아는 이 정권이 세금 더 쓰고 싶을 때 내세우는 지표가 국가 부채 비율이다. 국내총생산(GDP) 대비 부채 비율이 선진국보다 낮기 때문에 얼마든지 더 써도 된다는 것이다. ‘선진국 클럽’인 OECD의 국가 부채 비율은 평균 109%다. 미국 107%, 독일 70%이고 일본은 224%나 된다. 우리는 문 정부 들어 급증하긴 했어도 ‘고작’ 40%대 초반에 불과하다. 그러니 빚을 더 얻어쓸 여력이 충분하다고 한다. 재정 악화를 걱정하는 것은 시대에 뒤떨어진 ‘낡은 프레임’이라는 것이다.

문 정부만 그랬던 것은 아니다. 세금 펑펑 써도 문제없다는 것은 동서고금 모든 포퓰리스트의 공통된 허세였다. 남미 포퓰리즘의 원조인 아르헨티나 페론 정권은 "국민에게 아무리 줘도 경제는 안 망한다"고 주장했다. 경제 붕괴를 우려하면 "거짓말"로 몰아세웠다. 그러나 정작 그 말이 거짓이었음을 우리는 알고 있다. 문 정권의 논리도 다르지 않다. 지난 3년간 경제 실정(失政)을 숨기려 거짓말을 반복한 것처럼 또 하나의 '가짜 뉴스'로 실상을 호도하고 있다.

나랏빚 걱정 말라는 정부 주장이 거짓인 이유는 차고 넘친다. 우선 '그림자 부채'다. 회계상 정부 부채로 잡히진 않지만 결국 정부가 책임져야 할 사실상 나랏빚이 선진국보다 압도적으로 많다. 공공기관이나 비영리 공기업 부채 등이 그렇다. 정부가 자기 예산으로 해야 할 정책 사업을 공기업에 떠넘기는 일이 잦았기 때문이다.

예컨대 한전은 탈원전 부담을 떠안는 바람에 작년 한 해만 빚이 14조원 늘었다. 누적 부채는 129조원에 달한다. 이런 것들을 더한 공공 부문 부채(D3)는 GDP의 70% 수준에 육박한다. 공무원·군인연금 등을 메워넣기 위한 연금 충당 부채까지 합치면 넓은 개념의 국가 부채가 2018년에 이미 GDP의 100%에 달했다. 호주의 64%나 스웨덴의 55%를 훨씬 웃돌고, 미국의 136%에 필적한다. 여기에다 천문학적 가계 부채가 시한폭탄으로 도사리고 있다. 가계 빚을 합친 총부채는 GDP의 236%에 달해, 미국의 254%와 비슷하다. 결코 선진국보다 낫지 않다.

고령화 변수를 감안하면 상황은 더 심각하다. 인구의 14%가 65세 이상인 '고령 사회' 진입 시기가 영국·독일은 1975년, 일본은 1995년이었다. 한국은 2015년이다. 선진국보다 20~40년 늦게 고령 사회가 됐는데 고령화 속도는 세계에서 제일 빠르다. 노인 부양을 위한 지출이 이제부터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난다는 뜻이다. 얼마일지 가늠조차 불가능한 통일 비용은 또 어쩔 건가. 선진국도 고령 사회에 진입했을 무렵엔 빚이 많지 않았다. 지금 이 국가들의 고부채 구조는 수십 년 고령화 지출이 누적된 결과다. 그런 선진국과 단순 비교한다는 것 자체가 억지다.

무엇보다 결정적 차이는 기축(基軸)통화국이냐, 아니냐다. 미국은 아무리 빚이 많아도 이론적으론 부도가 날 수 없는 나라다. 달러를 찍어 내면 되기 때문이다. 유럽연합이나 일본도 그에 준하는 특권을 누린다. 일본은 미국과 무제한 통화스와프 계약까지 맺고 있어 달러 부족이 생길 수 없다. 한국은 아니다. 기축통화국이 아닌 나라가 만성 재정 적자에 빠지면 어떤 참사가 벌어지는지 역사가 말해주고 있다. 국가 신용도가 떨어지고 환율이 불안해지면서 외국 투자자로부터 기피당한다. 외화 자금이 빠져나가고 달러 조달이 어려워지며 신용 위기에 몰리게 된다. 20여 년 전 IMF 사태가 이런 구조였다.

나랏빚은 공짜가 아니다. 적자 국채 발행을 늘릴수록 국채 금리가 올라 이자 비용이 늘어나고, 이자를 갚기 위해 더 많이 빚을 내야 하는 악순환에 빠지게 된다. 빚이 빚을 부르는 '부채의 덫'이다. 급기야 돈을 찍어 세입 부족을 메우려다 초(超)인플레이션까지 초래하게 된다. 이것이 아르헨티나·그리스·베네수엘라 등이 걸었던 국가파산의 길이다.

여권은 총선에서 승리하자 면죄부라도 받은 양 세금 더 뿌릴 아이디어를 쏟아내고 있다. 세상이 바뀌었다며 국가 부채 비율이 60%까지는 올라가도 된다고 한다. 초유의 경제 위기 앞에서 정부가 주도권을 쥐고 적극적으로 재정 카드를 구사하는 것은 당연하다. 그 과정에서 일시적인 부채 비율 상승은 불가피하다. 그러나 빚을 늘리더라도 위기 수습 후엔 어떻게 다시 줄일 것인지 계획을 갖고 있어야 한다. 회수 불가능한 현금 뿌리기나 가성비 낮은 소모성 지출은 자제해야 한다는 뜻이다.

나랏빚은 외상값을 미래 세대에 떠넘기는 일종의 ‘세대 착취’다. 빚내서 펑펑 쓰는 ‘부채의 파티’가 영원할 것처럼 말한다면 그것은 사기에 불과하다. 빚 폭탄을 계속 뒤로 돌리며 시간을 벌 수 있겠지만 언제까지나 계속될 수는 없다. 역사 속 모든 포퓰리스트가 그랬듯, 국정 책임자가 빚 걱정 말라며 통 크게 인심 쓴다면 ‘피라미드 사기’라고 보아도 틀리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