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창균 논설주간

빌 클린턴 전 미 대통령은 60%대 높은 지지율을 유지한 채 8년 재선 임기를 마친 ‘성공한 대통령’으로 분류되지만 첫 출발은 아슬아슬했다. 40대 중반 나이의 애송이, 미국의 깡촌에 해당하는 아칸소 주지사라는 미천한 경력, 당선자 시절부터 천방지축 행보. 언론도 비판을 삼간다는 취임 100일까지 허니문 기간에 지지율이 급전직하했다.

바로 그 무렵인 1993년 초에 워싱턴에서 연수를 했다. 뒤 차창에 "Don't blame me. I didn't vote for him(내 탓 하지 마. 난 그에게 투표 안 했어)." 스티커를 붙인 자동차를 시내에서 종종 볼 수 있었다. "클린턴에게 투표한 민주당 지지자들, 너희들 탓이야"를 돌려 말한 것이다. 공화당 지지자들이 보내는 야유였다.

요즘도 미국에선 똑같은 문구가 적힌 티셔츠, 머그잔, 쇼핑백이 팔린다고 한다. 트럼프 대통령의 어이없는 행태에 화난 민주당 지지층이 고객으로 바뀌었을 뿐이다. 선거 패배자 편에 섰던 유권자들의 분풀이 문화가 한국에도 상륙했다. 지난주 대검찰청 앞을 지나다 맞은편에서 발견한 플래카드에는 이런 글이 쓰여 있었다.

"우리는 민주당 안 찍었어!! 대한민국 경제 망하면 민주당 선택한 당신들이 책임져!!" 하얀색 바탕 천에 꾹꾹 눌러쓴 것같이 굵직한 빨간 글씨, 문장 끝마다 두 개씩 달린 느낌표가 행인들을 향해 아우성치고 있었다.

문재인 정부에 비판적인 국민 상당수는 선거가 끝난 지 한 달이 가깝도록 마음을 추스르지 못하고 있다. 선거를 앞두고 극적으로 반전된 코로나 사태, 미래통합당의 한심한 졸전을 감안하더라도 여당이 사상 초유의 압승을 거둔 이유를 모르겠다는 것이다.

정권 스스로 깃발을 접은 소득 주도 성장, 대통령 집무실의 상황판을 민망하게 만든 일자리 참사, 나라 성장 동력에 자해행위를 한 탈원전에 이르기까지 이 정부의 경제 성적표는 누가 봐도 낙제점이다. 구걸하고 뺨 맞기가 되풀이된 대북 정책, 사방 천지에서 외톨이 취급을 받게 된 외교 정책도 평가해줄 대목이 없다. 민심을 뒤집어 놓고 국민 대신 국민을 열 받게 한 장본인에게 사과한 '조국 사태', 정권 쪽 사람들조차 "범죄 혐의가 3·15 부정선거 수준"이라는 '울산 선거 공작'처럼 매를 버는 일까지 저질렀다. 그런 집권 세력이 뭘 잘했다고 개헌선에 육박하는 의석을 안겨주나.

선거 결과를 못 받아들이는 보수 지지층은 두 흐름으로 나뉘었다. 한 갈래는 개표 조작 가능성에 매달린다. 통계 전문가들까지 "서울, 인천, 경기의 사전득표율 결과가 수상하다"고 거들면서 음모설에 힘이 실리고 있다. 이 논란은 문제가 된 선거구 한두 곳만 재개표를 하면 가부간에 결론이 날 것이다.

또 한 갈래는 집권당에 압승을 안겨준 표심을 폄하하고 멸시하면서 분을 삭인다. 선거 결과를 분석하는 기사나 칼럼에 달린 보수층 댓글에는 '개, 돼지'라는 표현이 자주 등장한다. 반대편에 표를 던진 유권자를 향한 비난이다. 문재인 정부의 돈 살포에 혹한 나머지 아무 생각 없이 여당에 몰표를 던졌다는 것이다. "민주당 선택한 당신들이 책임져"라는 대검찰청 앞 플래카드에도 이런 심리가 담겨 있을 것이다.

4·15 총선에 참가한 2912만6396명 유권자 모두가 나라의 장래를 생각하며 투표권을 행사한 것은 아닐 것이다. 맹목적인 지지자는 진보, 보수 양 진영에 각각 존재한다. 이런 양극단을 더하고 빼고 나면 그 시점에서의 평균적 표심이 드러난다. 그렇다면 전국 단위의 선거 결과가 늘 국가에 도움이 되는 방향으로 나왔느냐는 질문이 꼬리를 문다. 선거 민심도 때로 궤도를 이탈하지만 진보와 보수 사이를 시계추처럼 오가며 승패를 안겨온 선거가 긴 흐름 속에서 이 나라를 여기까지 발전시켜 왔다고 믿는다. 그렇게 믿어야 다음 선거를 기다리며 준비할 수 있다. 나와 다른 선택을 한 유권자를 '개, 돼지'라고 부르면서 어떻게 그들의 선택이 바뀌기를 기대하겠나. 국가 진로 결정에서 배제된 세력의 패배주의로 비칠 뿐이다.

노무현 전 대통령이 만들고 싶어 했던 나라 모습에 동의하지 않는다. 그러나 강고한 지역주의 벽을 넘어 보려 몸부림쳤던 그의 치열함을 존중한다. 2000년 총선에서 네 번째 부산 패배가 확인됐을 때 핵심 참모들은 “납득할 수 없다. 어떻게 이럴 수 있나”라며 유권자들을 원망했다. 노 전 대통령은 “농부가 밭을 탓할 수 있느냐. 또 털고 일어나야지”라고 달랬다. 그리고 2년 8개월 후 국민은 그를 대한민국 16대 대통령으로 선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