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도를 둘러싼 한국과 일본의 갈등은 한편의 대하드라마와 같다. 수많은 집념어린 인물들이 등장하고, 여러 가지 쟁점을 놓고 격론과 공방이 오간다. 그리고 무대 위에는 주인공인 한·일 양국뿐 아니라 심판 격인 미국을 중심으로 하는 국제사회가 있다. 1945년 일제 패망 이후 본격화된 ‘독도 문제’의 역사와 현황을 그동안 잘 알려지지 않았던 내용들을 포함하여 스토리텔링 방식으로 매주 일요일 연재한다. /편집자

1947년 8월 18일 오전 7시, 조선산악회(한국산악회의 전신)가 조직한 ‘울릉도·독도 학술조사대’가 경상북도 포항항을 출발했다. 해안경비대 소속의 경비정 대전호에 탑승한 학술조사대는 대장을 맡은 조선산악회장 송석하(민속학자)를 비롯해서 국어학자 방종현, 고고학자 김원용, 한학자 임창순, 언론인 홍종인 등 사회과학반, ‘나비박사’로 유명한 곤충학자 석주명, 식물학자 이영로 등 동식물학반, 농림반·지질광물반·의학반·보도반·전기통신반 등 63명으로 구성됐다. 여기에 남조선과도정부에서 파견한 국사관 관장 신석호, 외무처 일본과장 추인봉, 문교부 편수사 이봉수, 수산국 기술사 한기준 등 공무원 4명이 합류했다. 그리고 도중에 들른 대구와 포항에서 경상북도와 경찰 직원들이 추가돼 총 80여명으로 불어났다.

울릉도와 독도에 광복 후 처음으로 대규모 학술조사대가 파견된 것은 그해 4월 독도 근해에서 고기잡이를 하던 우리 어선이 일본 어선의 공격을 받은 것이 계기가 됐다. 1947년 6월 20일 대구에서 발행되는 『대구시보(大邱時報)』에 ‘왜적일인(倭賊日人)의 얼빠진 수작’이라는 자극적인 제목으로 이 사실이 보도되고, 이어 7월 하순 중앙 일간지들도 관련 기사를 싣기 시작하면서 독도 문제는 국가적 관심사로 떠올랐다.

독도 부근에서 일본 어선이 한국 어선을 공격한 사실을 보도한 '대구시보' 1947년 6월 20일자.

마침 일본에서도 독도 문제에 관심이 고조되고 있었다. 제2차 세계대전 종전 후 패전국 일본에 대한 관리를 맡은 극동위원회(Far Eastern Commission·13개 국으로 구성)는 1947년 7월 11일 “일본의 주권은 혼슈(本州)·북해도·큐슈(九州)·시코쿠(四國)의 제도(諸島)와 금후 결정될 수 있는 주위의 제소도(諸小島)에 한정될 것”이라는 ‘대일(對日)기본정책’을 발표했다. 이는 일본에 점령군으로 진주한 미군이 1945년 9월 5일 ‘대일방침’을 통해 “일본의 주권은 혼슈·북해도·큐슈·시코쿠의 사대도(四大島)에 한(限)한다”고 밝혔던 것과 달랐다. ‘주위의 제소도’에 독도를 포함시키고 싶었던 일본에서 독도가 일본 영토라는 주장이 일어났다.

당시 38도선 이남 지역의 행정책임자였던 남조선과도정부 민정장관 안재홍은 역사학자이자 언론인으로서 한·일간의 갈등 요인인 독도 문제가 중요한 고비에 이르렀다는 사실을 직감했다. 그는 전문가들과의 회의를 거쳐 독도에 조사단을 파견하기로 했다. 하지만 미군정 아래서 일본과의 외교적 마찰을 피하기 위해 조선산악회가 조사대를 보내는 형식을 취하기로 했다.

일제시기에 활동하던 조선인 산악인들이 중심이 돼 광복 직후인 1945년 9월 15일 발족한 조선산악회는 단순한 등산 동호인 조직이 아니라 국토 조사와 탐험을 통해 되찾은 나라와 민족 사랑을 실천하는 단체였다. 이들은 창립 후 첫 과제로 일제가 유린한 국토를 탐사하는 ‘국토구명(究明)사업’을 시작해 한라산, 오대산, 소백산을 차례로 찾았다. 울릉도·독도 조사대 파견은 이들이 벌인 네 번째 국토구명사업이었다.

8월 18일 오후 6시 울릉도 도동항에 도착한 학술조사대는 하루를 쉬며 강연회와 환담회 등을 가졌다. 그리고 다음날인 8월 20일 새벽 다시 대전호를 타고 독도로 향했다. 지금도 마찬가지이지만 독도 상륙 가능 여부는 날씨에 좌우된다. 바람이 세거나 파도가 일면 가까이 가기 어렵다. 더구나 당시는 접안시설도 없던 때라서 더욱 독도에 접근하는 것이 쉽지 않았다. 다행히도 이날은 날씨가 맑고 바람이나 파도가 강하지 않았다. 천행이었다.

1947년 8월 18일 울릉도에 도착한 '울릉도·독도 학술조사대'.

오전 9시가 조금 지나 독도 부근에 도착한 학술조사대는 동도와 서도 사이에 대전호를 멈춘 후 작은 배로 갈아타고 동도에 상륙했다. 동도의 서쪽 해변에 짐을 풀고 동식물 표본 채집, 목측 측량, 지형 파악, 사진 촬영 등 조사 활동을 벌인 뒤 다시 작은 배를 타고 서도로 향했다. 이들은 서도에서 바다사자 새끼 세 마리를 잡았다. 울릉도 주민들이 ‘가제’라고 부르는 바다사자는 독도 주변에 무리를 지어 살고 있었다.

학술조사대는 독도의 동도에 ‘朝鮮 鬱陵島 南面 獨島’ ‘鬱陵島 獨島 學術調査隊 紀念’이라고 쓴 두 개의 표목을 세웠다. 독도가 한국 영토임을 표시한 최초의 시설물이었다. 오후 3시 반 무렵 독도 조사 활동을 마친 일행은 다시 울릉도 도동항으로 돌아왔다.

조선산악회가 1947년 8월 독도에 처음 설치한 한국 영토 표목.

기본 과제인 독도 조사를 마친 학술조사대는 8월 21일부터 25일까지 울릉도에서 성인봉 답사, 의료 진료, 특별강연회 등을 벌였다. 이 기간 동안 남조선과도정부에서 파견한 인사들은 훗날 중요한 의미를 지니는 큰 성과를 거두었다. 역사학자인 국사관 관장 신석호가 울릉군청에서 발견한 ‘심흥택 보고서’와 외무처 일본과장 추인봉의 울릉도 노인 홍재현의 독도 관련 증언 채록이었다.

‘심흥택 보고서’는 1905년 일본의 독도 침탈 때 울릉도 군수가 이 사실을 알자마자 정부에 보낸 보고서다. 앞서 언급한 『대구시보』 기사에는 “한말 당시 국정이 극도로 피폐한 틈을 타서 광무 10년 음력 3월 4일 일인(日人)들이 이 도서를 삼키려고 도근현(島根縣)으로부터 대표단이 울릉도에 교섭 온 일이 있었는데 당시 동도사(同島司)는 도(道)당국에 이 전말을 보고하는 동시 선처를 청탁해온 문서가 아직도 남아있다”는 구절이 있었다.

일본은 1905년 1월 28일 내각회의에서 일방적으로 독도를 시마네현에 편입시키는 결정을 했다. 이어 2월 22일 ‘죽도(竹島) 편입에 대한 시마네현 고시 제40호’를 발표했다. 하지만 이 고시는 시마네현의 『현보(縣報)』와 지방신문인 『산음신문(山陰新聞)』에 조그맣게 게재됐을 뿐 중앙정부가 발행하는 『관보(官報)』에는 공시되지 않았다. 따라서 당시에는 우리 정부가 이를 알지 못했다.

조선 정부가 일본의 독도 침탈 사실을 알게 된 것은 1906년 3월 28일 시마네현의 관리 일행이 독도를 방문하고 돌아가는 길에 울릉도에 들러 “일본이 독도를 영토로 편입했고, 관리 책임자가 시찰했다”고 통보했을 때였다. 이 사실을 들은 울도군수(鬱島郡守) 심흥택은 바로 다음날 직속 상사인 강원도관찰사에게 “‘본군(本郡) 소속 독도’를 일본이 영지(領地)로 편입했다고 한다”는 긴급 보고서를 올렸다. 『대구시보』 기사에 따르면 이 보고서가 40년이 지난 그때까지 남아 있다는 것이었다.

울릉군청을 찾은 신석호는 옛날 문서 더미 속에서 ‘심흥택 보고서’의 부본(副本)을 찾아냈다. 1950년대 이후 본격화되는 한·일간의 독도 분쟁에서 우리 쪽의 유력한 증거로 사용되는 ‘심흥택 보고서’가 빛을 보는 순간이었다. 그는 이듬해인 1948년 12월 학술지 『사해(史海)』 창간호에 실린 「독도 소속에 대하여」라는 논문에서 그 내용을 공개했다.

‘심흥택 보고서’는 한국 쪽 문서로는 ‘독도’라는 명칭이 처음 나오고 대한제국 정부가 독도를 우리 영토로 인식했음을 보여주는 귀중한 자료이다. 하지만 신석호가 확인한 이 보고서의 부본은 그후 언제인가 사라져 연구자들이 애를 태웠다. 그러다가 1978년 8월 서울대 규장각에서 독도 관련 자료를 조사하던 송병기 단국대 교수가 심흥택의 보고를 받은 강원도관찰사가 다시 의정부참정대신에게 보낸 보고서를 발견했다. 그 안에 ‘심흥택 보고서’의 내용이 그대로 담겨 있었다. 이렇게 해서 ‘심흥택 보고서’는 다시 우리 손으로 돌아왔다.

1906년 3월 강원도관찰사가 의정부에 올린 독도 관련 보고서. 울도군수 심흥택이 일본의 독도 침탈을 보고한 내용이 그대로 들어 있다.

당시 85세이던 홍재현의 독도 관련 증언은 한국 외무부가 1955년 간행한 자료집 『독도문제개론』에 수록돼 있다. 홍재현은 오랫동안 공도(空島) 정책을 쓰던 울릉도에 다시 주민 이주가 재개된 1880년대 중반에 아버지를 따라 일가족이 강릉에서 건너왔다. 이주 당시 20대 초반이던 그는 울릉도와 독도의 역사를 지켜본 산 증인이었다. 그의 증언 내용 가운데 독도와 관련된 것은 다음과 같았다.

▲ 독도가 울릉도의 속도(屬島)라는 것은 울릉도 개척 당시부터 도민(島民)이 모두 아는 사실이었다.
▲ 나도 다른 사람들과 함께 1903년부터 네다섯 차례 미역 채취나 바다사자(가제) 사냥을 위해 독도에 갔다 왔다.
▲ 독도는 날씨가 맑으면 울릉도에서 볼 수 있고, 동해에서 표류하는 어선은 독도에 표착하는 일이 종종 있었기 때문에 독도에 대한 울릉도민의 관심은 매우 크다.
▲ 광무 10년에 일본 관리 일행이 울릉도에 와서 독도를 일본 소유라고 무리하게 주장한 사실은 나도 안다. (…) 당시 이를 전해들은 도민이나 어업자들은 크게 분개했다.

홍재현의 증언은 객관적인 역사적 사실과 부합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한국과 일본 사이에 독도 분쟁이 시작될 무렵 독도에 대한 울릉도 주민들의 인식을 보여주어 증언으로서 가치가 높았다.

울릉도에서 9박10일의 일정을 보내면서 기대했던 것 이상으로 큰 성과를 거둔 ‘울릉도·독도 학술조사대’는 1947년 8월 26일 아침 도동항을 떠나 그날 밤 포항항에 도착했다. 그리고 다음날 포항을 출발해 대구를 거쳐 8월 28일 서울로 돌아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