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지털 격변’ 바람이 거센 우리 산업계에 아놀로그 전통 기업일수록 변화와 혁신은 절실하면서도 힘든 과제이다. 1963년 출범한 전통 내의(內衣) 제조기업 ‘쌍방울’이 여기에 승부수를 던졌다.

작년 7월 마스크 사업에 진출하고 11월에는 덩치가 두배쯤 큰 여성 속옷 기업 남영비비안을 인수한 쌍방울이 지난달 31일, 올해 42세인 김세호씨를 대표이사(CEO)로 임명한 것이다. 57년 역사상 최연소 사장이다.
2003년 공채로 입사한 김 사장은 쌍방울 한 회사에서만 18년간 일했다. 유명 컨설턴트 출신도 아니고 외국 유학이나 연수 경험은 물론 회사 안팎에 특별한 '끈'도 없다.

국내 500대 기업 대표이사 580명의 평균 연령은 59.5세('CEO 스코어' 올 2월 조사)이다. 포천 500대 기업 CEO의 평균 연령(52.8세, 작년 기준)도 50대 초반으로 10년 전 보다 다섯 살 정도 높아졌다. 이런 마당에 쌍방울은 왜 40대 초반의 보통 샐러리맨을 CEO로 발탁했을까.

이달 7일 오후 서울지하철 6호선 신당역 8번 출구에서 200m쯤 떨어져 있는 쌍방울 본사를 들어서자 층마다 '쌍방울人의 다짐' '대한민국 민족기업' 같은 글귀들이 보였다.

서울 중구 무학동 소재 쌍방울 본사 건물 외관


9층 사무실에서 만난 김세호 사장은 "작년 11월 사내 모든 직원들을 대상으로 한 '내가 쌍방울의 총괄 경영부사장이 된다면?'이라는 공모전에서 1등으로 선정돼 부사장으로 특별승진했고 다시 4개월 만에 사장이 됐다"고 밝혔다.

작년 11월 차장에서 부사장, 사장으로 고속 승진
-당시 어떤 아이디어를 냈나?
"'새로 오시는 부사장에게 드리는 글'이라는 편지 형식으로 회사의 문제점과 개선 방안을 PPT(파워포인트)에 담았다. '변화가 없으면 이대로 주저앉아 죽는다. 해외 시장과 속옷을 연계한 신사업 개척으로 미래를 대비해야 한다'며 온라인 사업 강화 같은 개선 방안도 제시했다."

-쌍방울의 문제는 무엇이었나?
"'하던 일만 하면 된다. 새 일 만들지 말고 가만 있어라'라며 안주하는 분위기였다. 제안을 해도 위로 보고가 올라가지 않고 커트 당했다. 디지털이 유통의 대세인데도 작년까지 쌍방울의 제품 유통은 90~95%가 오프라인으로 이뤄지고 있었다."

입사후 대부분 영업 분야에서 일한 그는 초년병때부터 조직문화 혁신을 위한 파격적인 제안을 했다. 한 예로 대리·과장급 실무자를 부서장으로 앉히고 부서장을 현장으로 보내는 유연한 경영 구조를 구축하자고 했다.

쌍방울 57년 역사상 최연소 사장인 김세호 대표이사(42)

-왜 그런 제안을 했는가?
"진취적인 아이디어를 갖고 있다가도 관리자가 되면 그런 생각을 접고 현실에 동화되는 경우가 너무 많았다. 조직에 새 바람을 불러 넣고 긴장감을 높일 수 있다고 봤다."

김 사장은 작년 12월 부사장 취임 후 사내 9개 부서장을 모두 과장, 차장급 사원으로 교체했다. 전임 부서장들은 해당 부서의 팀장 등이 됐다. 최근 선임한 이사 2명도 모두 40대이다.

그는 “나를 포함한 부서장 9명과 각 부서 마다 1명씩 즉 회사 총원(196명)의 10% 정도인 20명만 마음 먹고 움직이면 회사가 반드시 달라질 것”이라고 말했다.

"빠른 의사 결정과 확실한 동기 부여가 핵심이다"

-CEO로서 어떤 일에 주력할 건가?
"CEO는 신속한 의사결정과 직원들에게 확실한 동기(動機) 부여만 해주면 된다고 믿는다. 이 두 가지에 집중하려 한다. 특히 의사 결정이 빨라야 새 일도 시도하고, 실패하더라도 달리 도전할 수 있다."

이런 '소신'으로 그는 새 성장사업인 '마스크'를 직접 챙겼다.
올 2월 중국 지린성 연변주정부와 미세먼지 필터 장착 마스크 350만개 공급 계약을 체결했고 지난달에는 태전그룹 계열사 오엔케이와 연말까지 마스크 1740만개 공급 계약을 맺었다. 계약 금액(124억원)은 작년 총매출액의 13%에 육박하는 '대박' 급이다.

방유선(40) 사업부장은 “마스크 제품 기획부터 결재, 입고까지 예전 같으면 한달 정도 걸렸지만 이번에는 2주일만에 모두 끝냈다”고 말했다. 김 사장의 속도감 있는 의사결정과 집중력이 빛을 발한 것이다.

또 3개월마다 우수 사원 3명(또는 팀)을 선정해 1000만원의 상금을 주기로 했다. 6~7개이던 결재 단계는 4~5개로 줄이고 정례 회의를 모두 없앴다. 대신 일일(日日) 사내 경영정보를 공유하면서 ‘구두 보고’를 권장한다.

쌍방울 본사 각 층마다 붙어 있는 '쌍방울인의 다짐'

그가 입사 2년차 햇병아리 사원이던 2004년, 회사는 매달 3명씩 우수 영업사원을 뽑아 시상했다. 그런데 김 사장은 당시 12개월 가운데 11개월 상(賞)을 받았다. 4년차이던 2006년에는 두 달 만에 65억원 어치의 속옷을 팔았다.

"더 많이 궁리하고 부지런하게 뛴게 성공 비결"

-어떻게 그런 실적을 냈나?
"더 많이 궁리하고 더 부지런하게 움직였다. 영업 지역이나 거래처가 바뀔 때마다 전임자들의 영업방식을 분석한 다음, 그들이 하던 것보다 한 두개를 꼭 더하려고 했다. 저녁후 곧장 거래처로 가서 3~4시간 같이 물건 팔다가 함께 문을 닫고 퇴근하는 생활도 많이 했다. 이렇게 했더니 비싸도 우리 제품을 훨씬 더 많이 팔 수 있었다."

그는 “입사후 지금까지 하루 5시간 이상 잠을 잔 적이 없다”며 “작년 말부터는 하루 3시간으로 줄였다”고 했다. 10여년 전부터 철인3종 경기에 매년 출전했고 최근에는 산악 장애물 달리기로 체력을 단련한다.

-목표가 사장이었나? 왜 그렇게 열심히 사는가?
"도전하고 한계를 깨는 걸 좋아한다. 입사 초부터 직장 생활을 마지못해 하지 않고 즐기면서 열심히 하겠다고 마음 먹었다. 다른 사람이나 경쟁사에 지는 것을 싫어해 1개라도 더 팔려고 했다."

-좌우명이 있나?
"'오늘이 내 인생의 첫 날이다(Today is the first day in my life)'라는 말을 마음에 새기고 있다. 아무리 힘들어도 포기하지 않고 위기가 기회라고 생각한다."

-20~30대 사원들에게 선배로서 충고한다면.
"주어진 일을 완수하는 한편 자기개발에 노력해 '내 만의 무기'를 가지라고 얘기한다. 준비하면 반드시 기회가 온다."

그는 “2010년부터 2년 간 야간과정으로 대학교 중국어과에 등록해 중국어를 마스터했다”고 했다.

쌍방울 본사 1층 엘레베이터 앞 모습.

"디지털 격변기, 전통 기업들 주목할만한 시도"

TRY(트라이), 히트업, 쿨루션 등 13개 브랜드를 갖고 있는 쌍방울은 2000년대 초반 매출 2000억원에 영업이익률 30%의 우량 기업이었으나 지금은 매출 1000억여원에 영업이익률은 3%대로 쪼그라들었다.

하지만 김세호 사장은 “아무런 시도도 않다가 죽을 수는 없다는 공감대가 형성돼 있다. 모든 사원들과 한 마음이 돼 제2의 전성기를 이루고 싶다”고 했다.

김경준 딜로이트컨설팅 부회장은 “쌍방울의 40대 초반 사장 발탁은 한 개인이나 한 기업의 성공실패 차원을 넘어 디지털 전환 격랑기에 조직문화 혁신을 고민하는 한국의 모든 전통 기업들이 진지하게 주목할 필요가 있는 의미있는 시도”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