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5대 그룹인 롯데그룹 최고 경영진은 매일 밤늦게까지 위기 대응 전략을 세우느라 분주하다. 롯데그룹의 수익을 창출하는 두 축은 '화학'과 '유통'. 한 산업이 좋지 않으면 다른 쪽에서 만회하는 '환상 구조'였는데 최근엔 화학·유통이 모두 죽 쑤는 '새로운 세상'이 열린 것이다. 롯데그룹의 대표적 현금 창출원 롯데케미칼은 2018년만 해도 영업이익이 2조원에 육박했지만, 지난해에는 1조원을 간신히 넘겼다. 올해는 상황이 더 심각해 울산 공장의 고순도 테레프탈산(PTA) 공정의 가동 중단까지 검토하고 있다. 롯데쇼핑 역시 지난해 영업이익이 전년 대비 28.3% 감소했다. 온라인으로 바뀌는 유통 패러다임에 뒤늦게 대응한 측면도 있지만, 각종 규제 또한 유통 기업의 어려움을 배가시키고 있다는 분석이다. 2012년 의무 휴업 규제가 도입되고, 재래시장 인근 입점도 사실상 막힌 상황이다. 여기에 더해 급격한 최저임금 인상이 전통적 유통 기업들의 숨통을 조였다. 또 다른 유통 기업 이마트는 영업이익이 67.5% 감소했다.

기저질환 앓는데 코로나 덮쳤다

요즘 재계에서는 '코로나 착시'를 조심해야 한다는 말이 나온다. 코로나 사태가 덮치기 이전부터 우리 기업은 골병을 앓고 있었다는 것이다. 배터리를 만드는 LG화학과 삼성SDI는 지난해 영업이익이 전년 대비 각각 60.1%, 35.4% 줄었다. 두 기업은 지난해 에너지 저장 장치(ESS) 화재에 따른 충당금을 수천억원씩 설정하면서 영업이익이 급감했다. 업계 관계자는 "ESS 화재의 정확한 사고 원인을 규명하기 전부터 배터리 회사(LG화학·삼성SDI) 쪽으로 책임을 몰아가는 분위기가 있었다"며 "국제 경쟁이 심해지는 상황에서 우리 정부가 중심을 잡지 못하고 오히려 '국내 기업 제품에 문제가 있다'는 낙인을 찍는 꼴이 돼 두 기업이 어려움을 겪었다"고 말했다.

존폐 기로에 놓여 있는 국내 항공 산업 역시 코로나 사태 전부터 경영 상황이 크게 나빠졌다. 국내 항공업계 1위 기업인 대한항공의 지난해 영업이익은 2863억원으로 2018년보다 59% 감소했다. 대법원의 일본 강제징용 판결로 한일 긴장 관계가 최악으로 치닫자 알짜인 일본 노선이 무너졌기 때문이다. 항공업계에서는 정부 정책에도 일정 부분 책임이 있다는 볼멘소리가 나오고 있다. 항공업계 관계자는 "국내 항공 산업이 이미 포화 상태인데도 정부가 지난해 새로운 저비용 항공사(LCC) 3곳에 운항 허가를 내주면서 출혈 경쟁에 불을 붙인 것도 항공업이 벼랑 끝에 내몰린 원인"이라고 말했다. 여기에 코로나 사태까지 확산되자, 조만간 LCC 한두 곳은 도산할 수 있다는 우려까지 커지고 있다. 기름값과 월급도 지급할 돈이 없는 이스타항공은 지난 24일부터 아예 영업을 중단한 상태다.

전문가들은 매출액 상위 50위에 들어가는 초우량 기업들이 '영업이익 반 토막'이라는 성적표를 받았다면 다른 기업들은 생존 기로에 서 있는 상황이라고 지적했다. 성태윤 연세대 경제학부 교수는 "초우량 기업이 기침을 할 정도면, 다른 대기업이나 중견·중소기업들은 독감에 걸려 있을 것"이라며 "매출액 상위 50대 기업의 영업이익이 반 토막 났다면 다른 기업은 이익 구조는 물론이고 아예 생존이 어려운 상황에 몰려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정부도 강도 높은 자구책 내놓아야"

전문가들은 이런 어려움을 타개하려면 정부의 과감한 정책 전환이 필요하다고 입을 모았다. 배상근 전국경제인연합회 전무는 "작년은 우리 기업이 경쟁력을 잃고 상한 몸으로 근근이 이끌어간 해"라며 "위기를 극복하고 반등하려면 유동성 공급이라는 인공호흡만으로는 안 된다. 급격한 임금 인상을 막고 근무시간의 유연성을 높이는 등 근본적 수술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해외에서도 비슷한 제안이 나오고 있다. 영국의 싱크탱크 IFS도 "최저임금 인상은 코로나 바이러스 사태로 힘겨운 시간을 보내고 있는 기업들에 또 다른 부담으로 작용할 수밖에 없다"며 "4월 1일 최저임금을 6.2% 인상할 계획인 영국 정부는 코로나 사태가 끝날 때까지 인상을 연기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전문가들은 입법 규제로 '타다'와 같은 일자리를 만드는 새로운 기업이 사라지거나, 더 강력해진 화평법(화학물질 등록 및 평가 등에 관한 법률)·화관법(화학물질 관리법)으로 기존 사업마저 포기하게 하는 것을 막아야 한다고 지적했다. 이경상 대한상의 경제조사본부장은 "지금 상황에서 규제 몇 가지 풀었다는 건 의미가 없다"며 "약해진 우리 산업 체력을 키우려면 신산업은 우선 허용하고 규제가 필요하다면 사후에 하는 방식으로 바꿔야 한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