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촌의 하류 부인은 나체로 바다에 잠수하여 전복, 소라를 잡고 해초를 따는 기능을 가지며, 일하는 모습이 감위민첩한 점과 체격의 이상한 발달상태를 보고 놀랄 것이다… 해녀는 자기 섬의 해안을 좁게 느껴서 경상남북도에서 강원, 황해, 함경의 여러 도에서 지나해(중국해)까지 출가 물질을 나가게 되었다."
1920년대 제주도를 관찰한 일본인들이 기술한 해녀들의 모습이다. 이같은 당시 제주 풍습과 문물을 들여다 볼 수 있는 자료가 미국 하와이대학 해밀턴도서관에서 발굴됐다(2018년 현혜경 제주연구원 책임연구원 발굴).
제주연구원(원장 김동전) 제주학연구센터(센터장 김순자)는 이 도서관이 소장하고 있는 일본어본 '濟州島ノ槪勢'(제주도의 개세) 책자를 영인과 전사, 번역을 통해 단행본 제주학연구총서 42 〈제주도개세, 濟州島ノ槪勢〉를 발간했다.
책자는 1928년 7월 조선총독부 산하 전라남도청 제주도에서 작성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풍속, 지리, 기상, 구획, 교통, 통신, 관아, 교육, 종교, 산업, 재정, 금융경제 등 총 176쪽(번역본 기준) 13장으로 이뤄져 있다.
이중 산업 부문에 대한 기술이 제일 길고 자세하다. 투자유치를 유도하는 듯한 문장들이 많고, 1930년대 문화말살 정책 직전이라서인지 조선에 대한 차별적 언사가 많이 들어가 있다. 제주인들을 미개함에서 계몽시켰다는 표현이나, 식민정치를 보호정치라고 표현하고 일본을 내국 이라고 표기하기도 했다.
문화적 특성을 기술하는 부분에서는 조혼 풍습이나 무속신앙, 관존민비 등을 폄하하는데 비해 조상을 모시는 장례문화는 높이 평가했다.
해녀에 대한 기술도 있는데 이미 이때 상당수의 해녀들이 해외로 '출가 물질'을 나간 것으로 파악하고 있다. 해녀에 관한 다른 자료에 따르면 제주해녀의 출가물질은 1890년대 언간에 경남으로 간 것이 시초였다. 제주도개세에 수록돼 있듯이 이후 일본, 따렌(大連), 칭다오(靑島), 블라디보스톡까지 확산됐다. 출가 해녀 수는 1910년대에 2500여 명에서 1930년대로 들어오면 4000여 명에 달하였다고 한다.
특히 일본에서 일본해녀(아마,あま)보다 능력이 출중해 일본쪽 요구로 진출이 늘었다. 그러다 해방이 되면서 국경이 막혀 해외 진출이 중단됐다.
한편 제주도개세 책자는 제주학연구센터 홈페이지에서 열람할 수 있다. 문의 제주학연구센터
제주행플 특별취재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