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3년 5월 23일 자 조선일보 조간 1면에 실린 ‘세계일주기’ 첫회.

'세계 일주의 길을 떠나면서.'

1933년 5월 23일 자 조선일보 조간 1면에 이순탁 연희전문학교 교수의 세계기행 연재를 알리는 사고(社告)가 실렸다. 아시아와 유럽, 아프리카, 미 대륙을 서쪽으로 한 바퀴 도는 9개월간의 대장정이었다. 교토제대 경제학부를 졸업한 이듬해인 1923년 연희전문 상과 교수로 부임한 이순탁은 패기 넘치는 경제학자였다. 백남운·노동규·조병옥·최순주 등 일본과 미국에서 경제학을 공부한 학자들을 영입해 연전(延專)을 근대 경제학의 중심지로 키웠다. 서른여섯 한창나이인 이순탁에게 학교는 1년간 쉬면서 세계여행을 다녀오라는 제안을 했다. 여행경비까지 보태준 안식년이었다.

'앉아서 책을 본다는 것은 많이 볼 수는 있지마는 이 지식은 오직 암상에 지나지 못한 것이요, 귀를 기울이고 눈을 넓혀서 산 사실을 견문하는 것이 오히려 나은 지식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다.' 사고와 함께 실린 첫 기행문에서 이순탁은 죽은 지식이 아니라 살아 움직이는 세계를 전달하겠다는 각오를 밝혔다. 발신지는 요코하마에서 상하이로 가는 가고시마마루(鹿島丸)호 선상이었다.

"2차 대전 불가피할 것" 예견

1933년 4월 24일 경성을 출발한 이순탁은 도쿄와 요코하마, 상하이, 홍콩, 싱가포르, 피낭, 콜롬보, 아덴, 카이로까지 달려갔다. 유럽으로 넘어가 이탈리아, 스위스, 프랑스, 벨기에, 네덜란드, 독일, 영국, 아일랜드에 이어 미국을 거쳐 이듬해 1월 20일 귀국했다. 9개월간 17개국을 돌아다니며 가는 곳마다 보고 느낀 기록을 써서 전신으로 보냈다.

조선일보에 60여 차례 연재된 이순탁의 세계일주기는 가벼운 여행 에세이가 아니었다. 서유럽을 휩쓴 대공황과 자본주의 위기, 파시즘의 현장을 경제학자 안목으로 관찰한 심층 보고서였다. 그가 여행에 나선 1933년은 세계가 대공황의 늪에서 아직 헤어나지 못한 채, 파시즘과 나치즘이 활개치기 시작한 시대였다. 일본도 군국주의로 치닫고 있었다. 이순탁은 관부연락선 위에서 고향을 등지고 돈 벌러 떠나는 조선인 노동자들의 비애를 토로했다. 이탈리아와 독일에선 노동조합과 사회민주당이 탄압받는 현장을 목격했다. 공산당 박멸, 유대인 추방, 책 불태우기 등을 통해 대중을 선동하는 나치즘이 기승을 떨치던 때였다. 그는 독일을 떠나면서 "제2차의 구주대전은 불가피할 것"이며 "그로 말미암아 인류는 더욱 위기와 도탄에 빠질 것"이라고 예견했다.

"모름즉이 미국을 가보라"

이순탁이 영국 런던에 도착한 1933년 7월 14일, 세계 66개국 대표들이 대공황을 타개하기 위해 모인 세계경제회의가 결렬됐다. '더욱 격렬한 경제블록의 대립, 금본위 이탈국과 금본위국의 항쟁, 관세 인상, 쇄국적 경제 정책의 발전 등 세계적 경제 전쟁이 다가올 것이다.' 그는 '성의 있는 국제 협조가 성립되지 않는 날에는 세계적 무력전쟁일 것이니…'라며 어두운 미래를 내다봤다.

이순탁의 독일 방문 직전인 1933년 5월 1일 베를린에서 열린 노동절 집회에 참석한 힌덴부르크 대통령과 히틀러 총리. 이순탁은 나치즘이 대두되는 독일 사회의 변화를 현장에서 목격하고 생생하게 전달했다.

마지막 여행지인 미국에서 그는 경탄했다. 인파와 광고, 상품에 놀랐고, 현대적 교통 통신 기관과 고층 빌딩, 무기에 찬사를 보냈다. 박물관·도서관·미술관·극장 등 문화 시설과 교육 제도에도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누구든지 이를 의심하거든 모름즉이 미국을 가보라. 상상하던 이상의 것을 발견할 것"이라고 썼다.

신문 연재가 끝나자마자 책으로 묶여 나왔다. '이 한 권 기행을 들고 이 교수의 과적(過跡·여정)을 밟아 보았으면….' 위당 정인보의 부러움 섞인 서문이 딸린 '최근 세계일주기'였다. 근대 지식인이 세계여행기를 신문에 연재하고 바로 책으로 묶어낸 것은 처음이었다. 이순탁의 세계일주기는 '은둔의 나라' 조선이 세계에 눈떠 민족의 살길을 찾도록 자극을 줬다. 하지만 귀국한 그에겐 탄압이 기다리고 있었다. 총독부는 1938년 '학내적화사건'을 일으켜 이순탁을 주모자로 구속했다. 2년 3개월 옥고를 치른 이순탁은 교단에서 추방됐다.

[초대내각 첫 기획처장… 6·25전쟁때 납북당해]

이순탁은 원래 '조선의 가와카미 하지메'로 알려질 만큼 사회주의 경향이 강한 학자로 알려졌다. 교토제대의 유명 마르크스주의 경제학자 가와카미 하지메(河上肇·1879~1946)의 수업을 듣고 영향을 받았다. 하지만 그는 식민지 조선은 사회주의로 이행할 만한 단계가 아니기에 일본부터 몰아내는 '민족적 정치 혁명'을 내세웠다. 조선물산장려회의 창립 발기인 및 이사, 신간회 발기인 및 간사로 참여한 것도 민족협동론과 좌우합작론이 당시 조선 실정에 맞는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이순탁은 1933년 동료·후배 경제학자들과 조선경제학회를 만들어 경성제대·경성상업학교를 중심으로 활동한 일본인 관학자들과 맞섰다.

1945년 9월 연희전문 교수로 복직한 이순탁은 해방 정국에 뛰어들었다. 한국국민당·한국민주당 창당 발기인으로 나라 만들기에 참여했다. 1946년 10월 한민당이 좌우합작위원회가 제시한 좌우합작 7원칙, 특히 무상분배안에 기초한 농지개혁안을 반대하자 한민당을 탈당하고 좌우합작운동에 본격적으로 몸담았다. 1947년 2월 좌우합작 노선인 민주주의독립전선 상무위원, 민주독립당 창당 정강정책위원으로 일했다. 민주독립당은 좌우합작 세력이 결집한 민족자주연맹의 강력한 토대가 됐다. 이듬해 4월엔 단독정부 수립을 반대하고 남북협상을 지지하는 문화인 108인 선언에 참여했다.

하지만 남북협상이 실패로 돌아가고 5·10 총선거로 대한민국 정부가 출범하자 이승만 초대 내각의 기획처장(정부위원)으로 일했다. 1950년 2대 총선에 무소속(서울 서대문을) 출마했으나 낙선했고, 6·25전쟁으로 납북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