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 일에 만약은 없다지만 노바크 조코비치(33)의 국적이 달랐다면 어땠을지 그의 테니스를 볼 때마다 상상한다. 노방 조코뱅이거나 노반 조코슈타트였다면? 미국인이었다면? 윔블던의 나라 영국 출신이었다면?
그랬다면 현대 테니스가 진화한 극한의 상징으로서 만장일치 추앙을 받았을지 모른다. 조코비치는 '황제' 로저 페더러(39·스위스)와 '황소' 라파엘 나달(34·스페인)이 양분하려던 남자 테니스판을 비집고 세계 1위로 우뚝 섰다. 조코비치의 그랜드슬램 대회 우승 17회(호주 오픈 8회, 프랑스 오픈 1회, 윔블던 5회, US오픈 3회) 기록은 페더러와 나달이 절정이었던 시기에 일군 성취다. 서브, 포핸드, 백핸드, 체력, 정신력 등 테니스에 필요한 모든 기술과 능력을 코트 표면을 가리지 않고 발휘한다. 올해 벌써 우승 트로피 세 개를 들었다.
하지만 조코비치는 세르비아 남자다. 성적에 비해 놀랍도록 인기가 없다. 발칸반도 세르비아는 인구가 약 700만명뿐이고, 1999년 미국과 서유럽이 연합한 NATO군의 공습을 받았다. 페더러의 우아한 백핸드 동작이 호화로운 스위스 시계의 정밀함을 빼닮았고 나달의 강력한 포핸드가 알타미르 동굴벽화처럼 약동하는 에너지로 들끓는다면, 조코비치의 라켓은 배고픈 권투 선수를 연상시킨다. 깡마른 근육질 몸매로 기신기신 코트에서 버틸지언정 끝내 이긴다. 시속 200㎞를 훌쩍 넘는 상대 서브를 받아쳐 리턴 에이스를 만드는 벽 같은 사내다.
그의 개암빛 눈동자는 벼랑 끝에 몰릴수록 맹금류로 돌변한다. 그 눈빛에 상대는 질린다. 작년 윔블던 결승전 페더러가 대표적 희생양이다. 당시 페더러는 네 시간 넘는 결투 끝에 5세트 더블 챔피언십 포인트 기회를 잡았다. 8-7로 앞선 자신의 서브 게임에서 40-15 리드. 한 포인트만 더 따면 통산 9번째 윔블던 우승이었고 만원 관중도 페더러를 응원했다. 그날 조코비치가 센터코트에서 감당한 야유 소리를 열역학적으로 환산한다면 북한 대포동 미사일 대여섯 개와는 너끈히 바꿔 먹을 것이다. 그런데 페더러가 졌다! 조코비치는 무서운 집중력으로 패싱샷을 성공시켜 듀스를 만들더니 이 게임을 이겼고 결국 챔피언이 됐다.
무슨 비결이 있길래 온 우주가 등 돌린 것 같은 막막한 상황에서 강한 걸까. 자서전과 언론 인터뷰 등을 종합하면 조코비치는 위기에 처할 때마다 21년 전 전쟁의 상흔을 떠올린다. 공습 사이렌 없는 새벽 물 뺀 수영장 바닥에서 훈련하던 나날, 빵과 우유 배급받으려고 하루종일 서던 줄, 이제는 10달러밖에 없다고 울던 아버지, 결국 사채 빚을 지고 살해 협박에 시달리며 장남을 레슨시킨 아버지, 동생 둘을 키우면서 하루 열다섯 시간씩 일하던 어머니, 돈과 비자가 없어 못 나간 해외 경기와 지하 방공호에서 그리던 챔피언의 꿈같은 것들.
"제게 테니스는 생존이 걸린 문제였어요. 총탄 자국 숭숭한 고향과 가족을 생각하면 한 포인트도 허투루 해선 안 됐죠. 그런 절박함이 제 심장을 키웠습니다. '난 바닥에서 올라온 사람이야. 어디 한번 덤벼봐'가 되는 거죠."
마스크 사려고 끝없이 늘어선 행렬, 격리된 사람들, 학교를 못 가는 아이들, 난민처럼 거부당하는 한국 여권, 휑한 거리…. 한국은 지금 '코로나 전쟁'을 치르고 있다. 전쟁이 초래하는 궁핍과 갈등에 숨이 막히지만 억지로 긍정적인 생각을 하나 해보자면 전쟁은 정신력을 단련시킨다는 사실이다. 조코비치가 그랬고 이미 우리의 윗세대가 증명해보였다. 이 전쟁이 하루빨리 끝나길 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