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2년 12월 초 조선일보 사장 조만식은 평안북도 정주로 가는 열차에 몸을 실었다. '금광왕' 방응모를 만나 조선일보 인수를 권유할 예정이었다. 앞서 편집국장 주요한, 전무 겸 영업국장 조병옥이 방응모에게 같은 부탁을 했지만 답변을 듣지 못했다. 그래서 평안도를 대표하는 민족 지도자 조만식이 직접 나선 것이다.

당시 조선일보는 재정적으로 몹시 불안정했다. 1924년 9월, 서른 살의 청년 독립운동가 신석우가 조선일보를 인수해서 의욕적으로 민족운동을 펼쳤지만 8년 만에 경영난에 봉착했다. 신석우와 안재홍 등 조선일보 경영진은 민족 지사였지 사업가는 아니었다. 운영 자금이 급했던 신석우는 고리대금 업자 임경래에게서 판권을 담보로 돈을 빌려 썼다. 그 돈을 갚지 못하자 임경래가 경영권을 행사하겠다고 나서는 바람에 1932년 6월부터 큰 홍역을 치렀다. 신간회 운동으로 징역을 살고 나온 조병옥이 동아일보 편집국장을 지낸 주요한과 함께 경영권을 되찾고 조만식을 사장으로 모셨지만 재정난은 여전했다. 결국 이들은 새로운 사주(社主)를 찾기로 했다. 평안도 출신인 조만식과 주요한은 동향(同鄕)의 신흥 재력가로 민족의식이 강한 방응모를 대상으로 정했다.

1935년 1월 조선일보가 한국 언론사상 처음으로 구입한 전용 비행기 앞에 선 간부들. 오른쪽부터 사장 방응모, 조종사 신용욱, 사회부장 이상호, 편집국장 김형원.

방응모는 먼 곳까지 몸소 찾아온 조만식의 간곡한 권유를 받아들여 조선일보 인수를 결단했다. 그러고 나서 두 사람은 술잔을 기울이며 함께 글씨를 썼다. 먼저 붓을 든 방응모가 '제제다사(濟濟多士)'라고 일필휘지했다. '시경(詩經)'에 나오는 문구로 "훌륭한 인재를 많이 등용해서 나라를 잘 다스린다"는 뜻이었다. 이어 붓을 든 조만식은 '기인위보(其仁爲寶)'라고 적었다. "인(仁)으로써 그러한 보배를 능히 이룰 수 있다"는 의미로 방응모에 대한 격려였다.

방응모는 1932년 말 그를 금광왕으로 만들어 준 교동금광을 135만원에 팔았다. 그러고 1933년 1월 18일 조선일보에 영업국장으로 입사했다. 이보다 이틀 앞선 1월 16일 조선호텔에서 자본금 20만원의 '주식회사 조선일보사' 발기회가 열렸다. 창립위원장은 방응모였다.

1933년 3월 22일 드디어 방응모가 조선일보 경영권을 인수했다. 그는 사장에 조만식을 다시 추대하고 자신은 부사장을 맡았다. 이어 조선일보의 중흥을 향한 발걸음이 시작됐다. 4월 들어 경성역 대합실에 '조선제일(朝鮮第一) 조선일보(朝鮮日報)'라는 대형 현수막이 걸렸다. 조선일보의 혁신을 약속하는 광고도 전국에 뿌려졌다. 그리고 4월 26일 자로 혁신 기념호 100만부를 발행해 무료 배포했다. 일간지 100만부 발행은 당시 아무도 상상할 수 없었다.

방응모가 조선일보 인수를 결심하고 조만식과 함께 쓴 휘호. ‘제제다사(濟濟多士)’ ‘기인위보(其仁爲寶)’라고 썼다.

혁신 기념호가 나오기 하루 전날인 4월 25일 조선일보는 태평로1가 61번지에 1100평이나 되는 신축 사옥 대지를 구입했다. 이 자리에는 1935년 7월 웅장한 5층 건물이 들어섰다. 3·4층을 터서 1200명을 수용하는 대강당을 비롯해 현대식 시설을 갖춘 조선일보 사옥은 곧 장안의 명소로 떠올랐다.

1933년 7월 사장에 취임한 방응모는 인재 영입에 적극 나섰다. 동아일보 편집국장과 경제부장으로 일하던 이광수와 서춘이 조선일보로 옮겨 왔다. 이광수는 부사장 겸 취체역, 편집국장, 학예부장, 정리부장 등 다섯 직책을 맡아 '조선 신문계의 무솔리니'라는 별명을 얻었다. 교토 제대 출신으로 당대 최고 경제 전문가로 정평이 났던 서춘은 주필 겸 경제부장으로 필봉을 휘둘렀다.

조선일보의 중흥을 널리 각인한 것은 이듬해인 1934년 7월 큰 수해가 삼남 지방을 강타했을 때 비행기를 빌려 한국 언론 사상 최초로 항공 취재에 나선 일이었다. 민간 항공의 개척자인 신용욱이 조종하는 '조선일보 비행기'는 취재는 물론 이재민 구호에도 엄청난 위력을 발휘했다. 이에 고무된 조선일보는 1935년 1월 전용 비행기를 구입하고 비행사 신용욱을 채용했다.

조선일보는 재력과 신문에 대한 의지, 사업가로서 능력을 두루 갖춘 방응모의 과감한 투자와 운영으로 일제 시기 조선에서 한글로 발행한 네 신문 가운데 '1등 신문'으로 올라서게 됐다.

"부호의 의무 다하는 금광왕으로 공경받아"

민족운동에 참여해온 방응모
"조선일보가 휴·폐간되는 건 우리의 대손실임을 깨달았다"

"응모도 조선 사람이라 소유하고 있는 금전을 사용(私用)에만 소비하는 것은 심회(心懷)가 불허(不許)하는 것이외다.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민족에게 유익하고 공중에게 공헌되는 것이 있으면 주저치 않는 것이 신조요 또한 자기(自期)하는 바외다. 신문은 조선 민중의 이목(耳目)을 대신하며 심장을 표현하는 일사(一事)외다. 조선일보가 휴·폐간되는 것이 우리 전체의 대암영(大暗影)이요 대손실임을 깨달아 인수하기로 작정했습니다."

방응모는 혁신기념호를 발행한 다음 날인 1933년 4월 27일 자 조선일보에 실린 '드리는 말씀'에서 조선일보 인수를 결심한 이유를 이렇게 밝혔다. 그러면서 "조선일보의 일장(一長)이 곧 동포제군(諸君)의 일장(一長)이요, 조선일보의 일단(一短)이 곧 동포제군의 일단(一短)이 될 것"이라며 "형제자매여, 지도하시고 원조하소서"라고 호소했다.

동아일보 정주지국을 맡아 민립대학 설립 지원 등 민족운동에 참여하던 방응모는 마흔을 넘긴 1924년 금광 사업에 뛰어들어 2년 넘게 갖은 고생을 한 뒤에 엄청난 금맥을 찾아냈다. 그가 운영하는 교동금광은 운산금광·창성금광·삼성금광에 버금가는 조선을 대표하는 금광으로 부상했다. 방응모는 '금광왕'의 대명사였던 최창학에 이어 김대원·박용운과 2인자를 다투는 반열에 올랐다.

그러나 방응모는 번 돈을 이웃과 민족을 위해서 쓰는 데 소극적이었던 대부분의 금광왕들과는 달랐다. 잡지 '삼천리' 1933년 10월 호에 실린 '3대 금광왕 성공'이란 글에서 필자 북북산인(北北山人)은 "오늘날 조선의 신문은 아직까지 소모 사업에 속한다"며 "영리사업이 아닌 기관에 50만금(金)씩 투(投)하는 분이 있다면 그는 존경에 값하는 인물이 아닐 수 없다"고 했다. 그리고 "(방응모)씨는 부호의 의무를 다할 줄 아는 인격자로 모두 공경하고 있다"며 "바라건대 금광왕들은 방응모씨를 본받아 사회와 고락을 같이하여 주기를 바란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