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지니아, 앨라배마에서 흑인 유권자 70% 이상 '몰표'
캘리포니아에서 승리한 샌더스, 4곳 승리 그쳐
5일 8시 기준 대의원 수 샌더스 441명 vs 바이든 512명

‘사망 선고를 받은 한 남자가 모든 것을 건 승부에서 삼전사기(三顚四起) 끝에 1승을 거둔다. 벼랑 끝에서 살아나 심기일전한 그는 이후 이어진 14 게임서 10승을 거두며 대(大) 역전극을 벌인다.’

드라마나 소설에서 나와도 진부할 법한 반전이 3일(현지 시각) 미국 민주당 대선 경선 레이스 최대 이벤트 ‘슈퍼 화요일(Super Tuesday)’에서 일어났다.

승자는 조 바이든 전(前) 부통령. 지난달 1차 경선지인 아이오와에서 4위, 2차인 뉴햄프셔에서 5위로 굴욕적 패배를 당한 바이든은 이날 1위 후보였던 버니 샌더스 상원의원을 10개 주에서 누르고 유리한 고지에 올랐다.

뉴욕타임즈(NYT)는 이날 "3일전 다 무너졌던 선거캠프를 자신의 힘으로 일으켜 세웠던 바이든이 오늘은 비범한 무력 시위(show of force)를 펼쳤다"고 평가했다.

3일(현지 시각) 미국 민주당 대선 경선 레이스 최대 이벤트 ‘슈퍼 화요일(Super Tuesday)’에서 선전한 조 바이든 전 부통령이 의기양양하게 연단으로 오르며 지지자들에게 인사하고 있다.

바이든은 앨라배마, 아칸소, 오클라호마, 테네시, 노스캐롤라이나 같은 남부 지역 뿐 아니라 매사추세츠와 버지니아 같은 동부 지역, 남부 텍사스까지 휩쓸며 미국 전역에 걸쳐 지지자를 끌어모았다.

당초 경선 레이스 선두였던 샌더스는 대의원 수 기준 최대 승부처였던 캘리포니아에서 승리했지만, 무섭게 추격하는 바이든에 기세가 눌리며 14개주 가운데 4개주에서만 승리하는 데 그쳤다.

정치적 사망 선고를 극복하기 위해 ‘미국 남부 고령 민주당 지지자들 마음을 사로잡겠다’던 바이든 선거캠프의 전략은 이날 정확히 들어맞았다. 처음으로 개표를 시작한 버지니아 경선부터 바이든은 흑인(아프로-아메리칸)표 가운데 71%를 차지해 16%에 그친 샌더스를 멀찌감치 제쳤다. 앨라배마와 노스캐롤라이나에서도 각각 전체 흑인 유권자의 72%, 62% 지지를 얻었다.

CNN의 흑인 정치 평론가인 밴 존슨은 흑인 인구 비중이 높은 승리에 대해 "흑인 대통령인 버락 오바마의 러닝메이트(부통령)에 대한 의리를 흑인들이 지킨 것"이라고 평가했다.

바이든은 캘리포니아에 차린 선거캠프에서 유권자들을 만나 "얼마 전까지만 해도 내가 ‘무너졌다’고 하는 의견이 대다수였지만, 오늘 나는 다시 살아났다"며 "사람들은 혁명을 이야기하고 있고, 우리는 움직이기 시작했다"고 말했다.

그는 중도 하차한 피트 부티지지 전 인디애나주 사우스벤드 시장과 에이미 클로버샤 상원의원이 '반(反)샌더스' 전선 대표로 자신을 지지해준 데 대해서도 감사 인사를 잊지 않았다.

이들이 자진 사퇴해 준 덕분에 그동안 뿔뿔이 나눠졌던 민주당 중도 진영 표가 바이든에게 쏠리며 반전 드라마를 썼기 때문이다.

그는 "(미네소타 출신)클로버샤 상원의원 덕분에 미네소타에서 이겼고, 베토 오로크 전 하원의원 덕분에 텍사스에서도 잘 해냈다"며 "부티지지 전 시장이 지지를 보내준 것 또한 무척 자랑스럽다"고 말했다.

버니 샌더스 상원의원이 자신의 정치적 고향인 버몬트주 벌링턴에서 선거인단을 찾아 인사하고 있다.

반면 ‘극단적 진보’ 성향 샌더스는 이날 본인이 20년 넘게 상원의원으로 일해 온 ‘텃밭’ 버몬트주와 콜로라도주, 유타주와 대의원 415명 표가 걸린 ‘최대 승부처’ 캘리포니아에서 승리를 거둔 것으로 나타났다.

버몬트를 제외하면 샌더스에게는 썩 개운하지 않은 승리였다. 샌더스는 버몬트에서는 과반이 넘는 득표율을 기록해 20%대 지지율에 머문 바이든을 따돌렸다. 반면 콜로라도와 유타에서는 승리를 거두긴 했지만, 득표율은 30% 중반 수준에 머물렀다. 버몬트와 유타는 각각 대의원 배정 수가 16명, 29명으로 승리를 거둬도 판세에 미치는 영향력이 작다.

대규모 대의원단이 걸린 캘리포니아에서는 30% 가까이 지지자를 확보했지만, 20%를 얻은 바이든과 큰 격차를 벌이지 못했다. 캘리포니아가 미국에서 가장 진보적인 색채가 강한 주로 꼽히는 점을 감안하면 고전한 셈이다.

미국 정치전문매체 더 힐은 "텍사스가 샌더스를 지지하는 히스패닉(중남미계) 비율이 높은 주(州) 임에도 내어준 점은 치명적"이라고 분석했다.

텍사스는 히스패닉 유권자 비율이 30%를 넘는 지역으로, 이들은 ‘불법 이민자들에 대한 모든 추방 정책을 중단하겠다’고 공언한 샌더스에 대한 충성도가 높다. 그러나 45세 이상 중도 진보 성향 텍사스 유권자들은 급진적인 샌더스 대신 바이든에 대거 표를 던진 것으로 나타났다.

샌더스는 이날 "트럼프와 똑같은 낡은 정치로는 트럼프를 꺾을 수 없다"며 "기업과 정치권에서 기득권 세력들이 하던 짓을 (바이든이) 똑같이 하고 있다"고 비난했다.

한편 샌더스와 바이든의 대항마로 눈길을 끌었던 ‘다크호스’ 마이클 블룸버그 전 뉴욕시장은 경선 레이스 첫 무대인 슈퍼 화요일 내내 유권자들에게 외면당하면서 앞길이 어두워졌다.

블룸버그는 초기 경선주를 건너뛰고 오직 슈퍼 화요일에만 5억달러(약 6000억원)를 쏟아부으며 전력투구했지만, 주요 주(州)에서는 단 한군데서도 승리를 거두지 못한 채 대의원 6명이 걸린 미국령 사모아에서만 지지율 49.9%를 얻는 데 그쳤다.

마이클 블룸버그 전 뉴욕시장이 3일 플로리다주 팜비치에서 슈퍼 화요일 선거 결과를 확인하며 지지자들에게 인사하고 있다.

AP는 이날 블룸버그 캠프 사정에 정통한 소식통을 인용, 캠프에서 블룸버그 전 시장의 경선 지속 여부에 대한 논의가 이뤄지고 있다고 전했다.

샌더스와 비슷한 색채를 띈 엘리자베스 워런 상원의원도 존재감이 사라졌다. 오클라호마에서 태어나 매사추세츠에서 상원의원을 지낸 워런은 두 곳 가운데 그 어느 곳에서도 승리하지 못했다. 심지어 자신의 ‘정치적 터전’인 매사추세츠에서도 바이든과 샌더스에 이어 3위를 기록하는 데 그쳤다.

당초 ‘샌더스의 대관식’이 될 가능성이 컸던 슈퍼 화요일에 바이든이 대역전극을 쓰며 약진한 결과, 올해 민주당 경선 레이스 최종 승부는 길게는 6월까지 이어질 전망이다. 바로 다음주 화요일 미시간과 미주리, 미시시피를 포함해 6개주에서 열리는 ‘미니 슈퍼 화요일’을 시작으로 민주당 경선은 6월까지 이어진다.

이 과정에서 블룸버그와 워런의 거취는 가장 큰 변수로 작용할 전망이다. 블룸버그와 워런은 슈퍼 화요일에서 대의원을 각 50여명 정도 확보했다. 향후 경선에 불이 붙으면 중도 진영과 진보 진영 모두에서 후보 단일화 요구가 더 커질 확률이 높은 가운데, 이들이 어느 편을 지지하느냐 여부는 승부의 중요한 가늠쇠가 될 것으로 보인다.

민주당 경선 승자를 결정짓는 ‘대의원 매직넘버’는 전체 3979명 가운데 과반인 1991명이다. 한국 시간으로 5일 8시 기준 샌더스는 대의원은 441명, 바이든은 512명을 확보했다.

경선은 미국 대선 본선처럼 주별 승리자가 선거인단을 모두 가져가는 승자독식제가 아니다. 득표율에 따라 대의원이 배정된다. 다만 득표율 15% 이하를 얻은 주자들은 아예 대의원을 배정받지 못한다. 이 표들은 15% 이상 득표한 주자들에게 원래 득표율에 비례해 배분하고, 이 과정에서 군소 주자들은 자연스럽게 정리된다.

2008년 미국 대선에서 50개 주 가운데 49개 주 결과를 정확히 예측해 명성을 얻은 선거분석기관 '파이브서티에이트(538)'은 "부티지지와 클로버샤가 바이든을 위해 자진 사퇴한 이후, 민주당 지지자 전체에서 바이든에 대한 선호도가 뚜렷하게 오르고 있다"고 분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