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은 4대 자유가 있는데 그것이 없어서 항상 민망하게 여기었다.'
조선일보 1920년 7월 16일 자 사회면은 온통 독립운동 기사였다. 3·1운동 민족 대표로 법정에 선 길선주 목사는 민족의 자유를 억압한 일제를 직접 겨냥했다. 이날 기사 제목은 '조선 독립운동의 수령(首領)/민족자결주의자 47인의 공판….' 또 다른 민족 대표 오화영은 3·1운동 직전의 회합을 '조선 독립을 목적으로 한 것'이라고 당당히 밝혔다. 창간 첫해인 1920년 내내 조선일보에 실린 민족 대표의 법정 진술과 옥중 인터뷰, 법정 스케치는 조선 민족의 독립 정신과 투쟁 의지에 불을 지핀 또 하나의 3·1운동이었다.
조선일보는 1919년 3월 이 땅을 뒤흔든 조선 민중의 만세 함성으로 탄생했다. 3·1 만세 시위에 적극 참가한 사람만 100만명이 넘고 사망자는 1100명이나 됐다. 총독부는 죽음을 각오한 민중의 저항에 놀라 우리말 민간 신문을 허가하고 무단(武斷) 통치에서 한 발짝 물러섰다. 1920년 3월 5일 첫 신문을 찍은 조선일보의 DNA에 저항 정신이 담겨 있을 수밖에 없는 이유다.
조선일보는 광복 이전엔 일제(日帝), 이후엔 권위주의 정부, 북한의 세습 독재와 맞서 싸웠다. 광우병 파동과 천안함 좌초설(說), 세월호 잠수함 충돌설 같은 운동권 좌파의 괴담과도 맞섰다. 독립과 건국, 산업화와 민주화, 정보화와 세계화, 선진화로 나라를 세우고 가꾸는 데 앞장섰다. 진실을 수호하기 위해 시대와 맞서고 시대를 이끌어온 100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