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부 A(53)씨는 지난 21일 은행이 보낸 '금융거래 정보 등의 제공사실 통보서'를 받았다. 서울 종로경찰서의 요청에 따라 A씨의 금융거래 내역을 넘겨줬다는 내용이었다. 쉽게 말해 경찰이 A씨 은행계좌를 추적했다는 것이었다. 불안감에 휩싸인 A씨는 통지서를 손에 쥔 채 생각에 잠겼다. '도대체 내가 뭘 잘못했지? 남편에게 5000만원을 송금했던 일 때문일까.' 고민하던 A씨는 경찰에 전화를 걸었다. 돌아온 대답은 "(보수단체) 광화문 집회 후원 계좌에 송금 내역이 있어서 조회했다"는 것이었다. 그제야 넉 달 전 자신이 서울 도심의 조국 법무장관 사퇴 요구 집회에 후원금 2만원을 송금했던 사실이 떠올랐다. A씨는 "집에서 살림만 하는 나도 통지서를 읽는 내내 무섭고 불안했는데, 금융거래가 많은 사업가나 자영업자들은 얼마나 불안하고 찜찜했을까"라며 "경찰이 소시민 계좌를 이렇게 막 뒤져봐도 되는 거냐"고 했다.

경찰이 작년 개천절 서울 광화문 범(汎)보수 집회를 주도한 '문재인 하야 범국민투쟁본부'(범투본)의 소액 후원자 계좌까지 대대적으로 들여다본 사실이 26일 확인됐다. 계좌를 조회당한 사람은 최소 수천 명으로 추정된다. 경찰은 "전광훈 한국기독교총연합회 목사의 기부금품법 위반 혐의 수사에 따른 불가피한 조회"라고 했지만, 1만~2만원씩 후원한 수많은 시민의 개인 은행계좌까지 들여다본 것은 과잉 수사라는 지적이 나온다.

본지 취재를 종합하면, 종로경찰서는 지난해 개천절 범보수 집회 때 계좌 이체로 이들을 후원한 사람들의 계좌를 작년 말부터 조회하고 있다. 경찰은 일부 계좌 주인에게 전화를 걸어 '입금한 목적' '집회에 참석한 이유' 등도 캐물었다.

경찰 수사 대상은 집회를 주도했던 전광훈 목사였다. 전 목사에 대해서는 '작년 10월 광화문 집회에서 헌금 봉투를 돌려 기부금을 받은 것이 기부금품법 위반'이라는 고발이 접수된 상태다. 현행 기부금품법은 1000만원 이상을 모금하려면 사전에 정부나 지방자치단체에 신고해야 하는데, 범투본이 그런 절차를 밟지 않았다는 게 고발 요지였다. 고발인은 '나꼼수' 출신 친문(親文) 방송인 김용민씨가 이끄는 시민단체였다. 전 목사는 이달 초 경찰 조사에서 "(받은 것은) 기부금이 아니라 헌금"이라며 "종교단체 헌금이나 모금을 '불법 모금'으로 몰아 조사하는 나라는 대한민국뿐"이라고 주장했다.

경찰은 작년 말 법원에서 발부받은 영장을 통해 후원자들의 계좌를 조회하고 있다. 범투본 계좌의 입출금 내역은 물론 해당 계좌에 돈을 보낸 사람들의 이름, 주소, 연락처 등 개인 정보까지 볼 수 있는 '포괄영장'이었다. 수도권에 근무하는 한 검사(檢事)는 "수사기관으로서는 편의를 위해 일단 포괄영장을 신청해보는 게 일반적이긴 한데, 최근 수년간 법원은 이 정도로 많은 사람이 걸린 사안에서는 거의 포괄영장을 발부해주지 않았다"며 "발부해준 게 이례적"이라고 했다.

계좌를 조회당한 사람은 수천 명 수준으로 추정된다. 이 범투본 계좌에는 수년간 약 8000명이 돈을 보냈다고 한다. 범투본 관계자는 "작년 11월 말부터 12월 초까지, '경찰에서 내 계좌를 조회했다'며 범투본에 걸려온 문의 전화만 100통이 넘고 지금도 이어지고 있다"고 했다. 경찰 수사팀에도 최근 "내가 왜 수사 대상에 올랐느냐"는 취지의 항의성 전화가 쏟아졌다.

경찰은 "기부금품법 위반인지를 확인하려면 계좌 조회가 불가피하다"는 입장이다. 수사팀은 "모인 돈이 기부금인지 헌금인지 판단하려면, 기본적으로 돈을 보낸 사람들에게 의견을 물어봐야 한다"며 "모금 당시 상황 등과 함께 분석해 헌금인지 기부금인지를 수사하는 게 목적이지, 후원한 개인들을 수사하려는 게 아니다"라고 했다.

하지만 수사 기관에 계좌가 들춰진 시민들은 불안해한다. 범투본 계좌에 3만원을 보낸 한 시민은 "불법 모금을 조사하려면 돈을 모은 사람들의 통장만 조사하면 될 것 아니냐"며 "무서워서 어디 성금이나 낼 수 있겠느냐"고 했다. 유모(66)씨는 "이런 식의 '저인망 수사'가 타당한 것인지 의문"이라고 했다.

경찰은 2017년에도 이른바 '태극기 집회'에 후원금을 낸 시민 2만명의 금융 계좌를 조회했고, 지난해엔 보수단체 국민행동본부에 후원한 5000여명 계좌를 들여다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