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 21일 서울중앙지법의 한 민사단독 법정. 피고석은 비어 있었다. 원고는 함경도 광산에서 노동일을 하다가 각각 2000년과 2001년 북한을 탈출한 고령(高齡)의 국군 포로다. 이 중 한 명만 법정에 출석했다.

"사건 번호 몇 호 시작하겠습니다. 변호인은 나오셨지요…."

박선영씨는 "살아서 귀환한 국군 포로 78%는 우리 병적기록부에 '전사자'로 분류돼 있었다"고 말했다.

판사에게는 일상적인 재판일지 모르나, 아마 이는 역사적 재판으로 남을 것이다. 작은 체구의 박선영(64)씨가 김정은과 북한을 상대로 한 국내 첫 손해배상 재판을 이끌어냈다. 그녀는 '물망초' 단체를 만들어 현대사에서 버림받은 소수와 약자를 위한 활동을 해온 인물이다. 비례대표 의원 시절인 2012년에는 탈북자 강제 북송 저지를 위해 주한 중국대사관 앞에서 11일간 단식 투쟁을 한 적도 있었다.

"월남전 포로에서 돌아온 존 매케인은 미국의 영웅이었는데, 북한을 탈출해온 국군 포로들은 우리 사회에서 숨어 있어야 할 대상으로 취급됐다. 이들의 존재와 명예 회복을 위해 소송을 제기했다. 6·25 발발 70년이나 됐다. 많이 늦었지만 지금이라도 판례(判例)를 한번 남겨보자는 마음이다."

돌아오지 못한 포로들

1953년 포로 교환 협정 당시 북한은 국군 포로 8656명을 돌려보냈다. 유엔 등에서 파악한 국군·유엔군 포로 수의 10%밖에 안 됐다. 전후 복구를 위한 인력 부족에 직면했던 북한이 포로를 감춰두고 안 넘겨줬던 것이다. 제네바협약에는 전쟁이 끝나면 포로 즉시 귀환이 명시돼 있다. 포로의 강제 억류 자체가 불법이다.

"돌아오지 못한 포로들은 1953년 북한 내무성 건설대에 배속돼 약 33개월 강제 노역을 했다. 그러다가 1956년 '김일성 교시 43호'에 의해 북한 주민 신분을 받아 함경도 탄광 지역에서 집단생활을 했다. 너무 거액의 손배소를 제기하면 재판이 열리지도 못하고 각하될 것 같아, 내무성 건설대 강제 노역에 한정해 각각 2100만원만 손해배상을 청구했다."

―거의 70년이나 흘렀는데, 지금 와서 법적 심판의 대상으로 삼을 수 있나?

"반인도적 범죄는 시효(時效)가 없다. 역대 정권은 국군 포로 문제에 관심이 없었고 해결 의지도 없었다. 이명박 정권 말기에 생존 국군 포로 한 명당 얼마씩 북한에 지불하고 모셔오는 '프라이 카우프 방식'을 내놓았지만 무산됐다. 나라를 위해 싸우다 포로가 된 이들의 문제를 해결해주는 게 국가의 존재 이유다."

―재판은 '증거제일주의'다. 북한이 국군 포로 송환을 거부하고, 강제 노역을 시켰다는 입증 자료는 있나?

"판사도 '국군 포로들이 탄광 노동을 했다고 주장하는데 입증할 수 있느냐'고 물었다. 내무성 건설대 관련 노동신문 기사와 국군 포로들을 북한 주민으로 편입하는 '김일성 교시 43호' 등 객관적 증거 자료가 있다."

―그걸로 충분히 입증됐다고 할 수 있나?

"재판부는 직접증거를 원했다. 국가정보원이 탈북해온 국군 포로를 합동 심문한 자료를 갖고 있다. 정보 공개를 청구했지만, 국정원에서는 일절 답이 없다. 재판에서 다른 국군 포로들을 참고 증인으로 내세울 수 있다. 또 국군 포로들이 강제 노역한 탄광 지역에서 살다가 탈북한 보건소장과 딸도 증언하겠다고 했다."

―북한을 탈출해온 국군 포로에 대해 그동안의 급여와 보로금이 지급됐다. 이미 우리 정부에 의해 그 억류 시기에 대한 손해배상이 이뤄졌다고 볼 수 있지 않은가?

"판사도 첫 공개재판 때 그런 취지로 말했다. 탈북해온 국군 포로가 한국에서 받은 돈은 크게 두 가지다. 하나는 군인으로서 전역을 하지 않았기에 북한 억류 시기의 월급을 복리이자로 계산해 받은 거다. 그리고 전쟁 당시 공과에 따른 보상금, 북한에서 갖고 온 정보 가치에 따라 지급되는 보로금을 받았다. 하지만 이는 국군 포로가 겪은 불법 강제 노역에 대한 배상과는 전혀 무관하다."

―민사재판에서 거의 유례없이 공판준비기일이 4차례나 열렸다고 들었다. 과연 재판할 수 있는 사안인지를 따진 것인가?

"북한과 김정은을 상대로 처음 제기한 국내 소송이다. 당사자 적격 문제, 재판 관할지, 청구 원인, 국제법과 국내법의 관계, 소장 송달 방법 등을 미리 짚고 넘어가야 했다."

―피고를 김정은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으로 명시했다. '당사자 적격'이란 김정은과 북한을 피고로 인정할 수 있느냐를 따지는 것인데?

"그렇다."

―판사는 북한 정권에 책임을 묻는 것에 대해 처음에는 회의적인 입장이었다고 들었다.

"판사는 '북한은 국가가 아니기 때문에 법인격(法人格)이 없다'고 했다. 민사재판 당사자는 독립된 권리·의무 능력의 주체여야 하는데, 그런 법인격을 갖추지 못했다는 거다."

―북한은 유엔에 가입돼 있고 엄연히 실체가 있지 않은가?

"대법원과 헌법재판소는 과거에'북한을 불법 반국가단체'라고 판결했다. 세상이 바뀌어도 '판례의 구속성'이라는 게 있다. 그 판례를 적용받으면 법인격이 없는 북한을 상대로 민사소송은 어렵다."

―법인격이 없는 불법단체나 조직에 대해 처벌해왔지 않나?

"민사가 아닌 형사처벌은 가능하다. 하지만 북한을 상대로 한 형사재판은 해봐야 아무런 실효가 없다."

―형사재판은 실효가 없고, 북한을 상대로 민사재판은 성립이 안 된다는 뜻인데?

"국제사법으로는 가능하다. 그래서 한번 따져보자는 것이다. 미국 법원에서 오토 웜비어 유족이 북한과 김정은을 대상으로 한 손해배상 청구가 받아들여졌다. 또 우리 판례로는 불법단체 북한에 대한 민사소송이 어렵지만, 대신 개인에 대해 책임을 물을 수 있다. 그래서 김정은에 대해서도 소송을 제기한 거다." 김정은의 상속비율

―판사는 피고 명단에서 김정은을 빼자는 입장이었다고 들었는데?

"판사가 '김정은에 대한 청구 원인이 뭐냐?'고 질문한 것이 그렇게 전해진 것 같다."

―손해배상을 청구한 국군 포로의 강제 노역은 김일성 집권 시기에 이뤄졌다. 김정은이 태어나기 전이다. 그럼에도 김정은에게 책임을 묻는 것이 법적으로 가능한가?

"포로로 잡혀 불법적인 강제 노역을 한 것은 김일성·김정일 집권 시기였지만, 김정은이 북한 정권을 물려받았다. 정권을 상속받았다는 것은 국군 포로의 강제 노역이라는 불법행위에 의한 이익 취득도 상속받았다고 봐야 한다. 피상속자 김정은에게 배상 책임이 있다는 거다."

―판사는 '김정은의 채무 상속 비율이 얼마나 되는지 계산해오라'고 했다는데?

"개인의 상속 비율을 따질 문제가 아니라고 본다. 김정은은 정권 통치자로서의 책임을 상속받았다. 김일성 혈통이 아닌 다른 누군가가 그 자리를 물려받았다 해도 똑같은 배상 책임이 부과되는 것이다."

―'재판 관할지'도 문제가 됐는데?

"판사는 '피고(김정은)는 평양에 있고 원고(국군 포로) 두 명의 거주지는 각각 다른데, 왜 서울에 소장(訴狀)을 제출했느냐'고 했다. 우리는 '소장 전달이 용이하지 않거나 주소를 알 수 없는 경우 대법원 소재지에 재판을 청구할 수 있다'는 조항을 들어 서울중앙지법에서 재판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민사재판이 이뤄지려면 반드시 피고에게 공소장이 전달돼야 한다. 법정에서 피고석이 비어 있었는데?

"판사가 이 점을 지적했다. 그래서 우리는 '북한 대사관이 개설된 영국 스위스 등이나 유엔대표부에 가서 어떤 식으로든 직접 전달하겠다. 아니면 공시(公示)송달을 해달라'고 했다."

―공시송달이란 법원 게시판이나 관보 등에 게재한 뒤 내용이 전달된 것으로 간주하고 재판을 진행하는 것인데?

"우리는 '김정은이 피고가 됐다는 사실을 언론 보도가 되도록 하겠다. 김정은 방에는 TV 10여 대가 있고 남한 뉴스를 다 보고 있으니 알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그렇게 해서 공시송달 절차를 밟을 수 있었다."

―설령 승소한다고 해도 북한으로부터 배상금을 받아낼 수 있겠나?

"판사가 이 점을 들어 '소송의 실효성이 없다'고 했다. 우리는 '국내에 있는 북한 자산을 강제집행할 것'이라고 말했다."

―국내에 무슨 북한 자산이 있나?

"임종석 전 비서실장이 남북경제문화협력재단을 만들어 2006년부터 우리 방송사들로부터 조선중앙TV 등의 영상 콘텐츠 저작권료를 대신 받아 북한에 전달해왔다. 하지만 2008년 남북관계 경색과 유엔 제재로 저작권료를 송금할 수 없게 되자 북한에 미지급한 저작권료를 법원에 공탁해놓았다. 20억원쯤 되는 걸로 알고 있다. 우리가 승소하면 이 공탁금을 강제집행하면 된다."

북한 정권의 아킬레스건

―어떻게 이런 착안을 했나?

"재작년에 오토 웜비어 가족은 북한을 상대로 소송을 해 5억달러 배상 판결을 받아냈다. 웜비어 부모는 미국 정부가 압류한 북한 선박(와이즈 어니스트)의 소유권을 주장해 이를 매각했다. 그전에 북한을 상대로 민사재판을 걸어 역시 승소했던 김동식 목사(2000년 탈북자 돕다 북한에 납치돼 사망)의 유족에게 매각 대금의 일부를 줬던 것으로 안다. 웜비어 부모는 스위스 계좌, 독일의 호스텔 등 세계 곳곳 북한의 재산을 찾아내 응징하겠다는 뜻도 밝혔다."

―미국에서 이뤄진 북한 선박 매각에 대해 북한 반응이 없었나?

"공식적인 반응이 없었다. 1968년 원산항 앞 공해상에서 북한 해군초계정에 의해 납치된 미국 정보 수집함 푸에블로호 선원 유족들이 미국에서 손해배상 소송을 하고 있는 걸로 안다. 우리도 똑같은 방식으로 해보려는 것이다. 이런 민사재판이 북한 정권에는 최고의 아킬레스건이다."

북한에 있는 국군 포로의 존재는 1994년 고(故) 조창호 중위의 귀환으로 처음 조명받았다. 지금까지 모두 국군 포로 80명이 돌아왔다. 살아서 귀환한 국군 포로 78%는 당시 우리 병적(兵籍) 기록부에 '전사자'로 분류돼 있었다. 우리 정부가 이렇게 국군 포로에 무관심했고 덮어왔다는 뜻이다.

현재 남한에 있는 생존 국군 포로는 23명이다. 북한에는 500여 명의 국군 포로가 생존해 있는 걸로 국방부는 추산하고 있다. 역사적인 재판의 다음 기일은 3월 24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