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4월 산불이 발생한 강원도 고성군에서 자원봉사자들이 전국 각지에서 보내온 헌 옷을 정리하고 있다. 당시 고성에는 기부한 헌 옷 53t이 쏟아졌다. 재해 복구에 힘써야 하는 인력 상당수가 헌 옷 분류에 매달려야 했다. 고성 경동대 체육관(작은 사진)에는 전국 각지에서 보내온 헌 옷 상자들이 가득 쌓였다.

“이런 기부는 이제 멈춰주길 바랍니다.”

지난 5일(현지 시각) 호주 빅토리아주(州) 대니얼 앤드루스 주지사가 뜻밖의 호소를 했다. 빅토리아주를 비롯한 호주 전역에는 지난해 9월부터 시작된 산불이 4개월 넘게 진행 중이다. 이런 상황에서 주지사가 도와달란 말 대신, 더는 도와주지 말란 요청을 한 것이다. 대니얼 주지사가 말한 '이런 기부'는 헌 옷과 음식 기부를 말한다.

"너무하다는 인상을 주고 싶지 않지만, 우리에겐 옷도 음식도 필요하지 않습니다. (이런 기부가) 정말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을 돕고 화재 진압에 활용해야 할 인력과 자원을 분산시키고 있어요."

어려움이 발생하면 도와야 한다는 게 인지상정. 그러나 어떤 도움은 상대를 더 힘들게 하거나, 곤란하게 만든다. 지난해 4월 발생한 강원도 고성군 산불 피해 현장에서도 비슷한 일이 있었다. 소셜 미디어를 통해 '헌 옷이 필요하다'는 잘못된 정보가 돌면서, 인구 2만7000여명의 소도시인 고성군에 53t의 헌 옷이 쏟아진 것이다. 어떻게 해야 상대에게 도움을 주는 좋은 기부가 될 수 있을까. '아무튼, 주말'이 들여다봤다.

처리에 8개월 걸린 고성 헌 옷 기부

'혹시 기념 티셔츠 등 안 입는 옷들 있으면 이쪽으로 좀 보내주세요. 이재민들 옷이 모두 타버렸답니다.'

지난해 4월 초, 강원도 고성 산불 이후 소셜 미디어와 맘카페 등을 중심으로 퍼진 글이다. 고성군이 공식적으로 요청한 게 아니다. 고성군청 측은 홈페이지를 통해 "잘못된 정보다. 제발 헌 옷을 보내지 말아달라"는 글까지 올렸지만, 전국 각지에서 53t의 옷이 쏟아졌다.

문제는 이제부터. 이렇게 도착한 헌 옷은 아무리 사용가치가 없더라도 엄연한 '구호물품'이기 때문에 사용처가 이재민으로 제한된다. 모인 헌 옷은 모두 보관해 분류작업을 거친 뒤, 이재민들에게만 배분해야 한다.

재난·재해 구호단체인 희망브리지 전국재해구호협회 최미현 대리는 "지정 기부품은 다른 사람에게 재기부하거나 못쓰는 물건이라도 버리는 게 어렵다"며 "기부품을 다른 필요한 곳에 재사용할 수 있게 하는 방안을 고려해 볼 필요가 있다"고 했다.

당시 자원봉사자뿐 아니라 피해 복구를 위해 파견된 군인까지 옷 분류에 투입됐다. 재해 복구에 힘써야 하는 인력이 헌 옷 분류로 분산된 것이다.

고성군은 분류한 헌 옷을 10여 차례 대형 장터를 통해 이재민들이 가져갈 수 있게 했다. 그래도 30t가량이 남아, 이를 고성종합운동장·고성종합체육관·컨테이너 창고 등에 나눠 보관했다. 지난해 8월에야 '고성군이 알아서 처리해도 된다'는 유권해석을 받아 아프리카 등 개발도상국과 국내 복지시설 등에 헌 옷을 보낼 수 있었다. 이렇게 하고도 10t이 남아, 의류폐기물 업체에 이를 판매했다. 폐기물 업체는 폐섬유를 재활용해 부직포나 각종 시트 등의 내장재를 만든다. 판매 비용은 김장 재료비로 써, 지난해 12월 이재민들에게 김치를 만들어 제공했다. 헌 옷을 최종적으로 처분하기까지 장장 8개월이 걸렸다.

희망브리지 구호사업팀 양수현 주임은 "재해가 발생하면 피해 이웃에게 어떻게든 도움을 주고자 하는 마음으로 물품 기부하는 분들이 많은데, 그 마음이 감사해서 최대한 잘 전달하고자 애쓰게 된다"며 "그러나 현장 필요와 관계없는 무분별한 물품 전달은 이재민에게 도움을 줄 수 없을 뿐 아니라, 현장의 원활한 구호활동에 걸림돌이 되기도 한다"고 했다.

희망브리지 등에 따르면 일반적으로 재해 발생 시 의복 등이 포함된 응급구호세트가 구호물자로 제공된다. 또 식품 같은 경우 편의점 등 유통기업과 구호물자 지원에 관한 양해각서(MOU)를 체결해, 현장에 조달할 수 있게 한다. 이 때문에 헌 옷이나 음식 같은 물품 기부 전에는 피해 지자체나 구호단체에 연락해서 필요한 물품과 수량 등을 먼저 문의하는 게 좋다. 구호품이 충분하다면 성금으로 기부해야 이재민들의 사정에 맞게 쓰일 수 있다. 호주 주지사도 헌 옷과 음식 대신 성금 기부를 독려했다.

코팅이 다 벗겨진 프라이팬(위)과 새카맣게 때가 탄 속옷. 모두 아름다운 가게에 실제로 도착한 기증품이다.

기증품 중 60% 이상 폐기된다

새카맣게 때가 탄 속옷, 가죽이 터진 가방, 코팅이 벗겨진 프라이팬….

최근 '아름다운 가게'에 실제 도착한 기증품들이다. 아름다운 가게는 내가 쓰지 않는 물건을 매장에 기증해, 이를 필요한 사람에게 재판매하는 비영리기구. 전국 110개 매장이 있다. 그러나 이 물품들이 과연 기증품이 맞을까.

몇 년 전부터 아름다운 가게에 물건을 기증하면, 연말정산 시 기부금 세액공제를 받을 수 있다는 사실이 알려지며 가게 기부량이 크게 늘었다. 그러나 일부 기부자들은 내가 안 쓰는 물건일 뿐 아니라 남도 쓸 수 없는 물건을 내놓는다. 아예 온라인 커뮤니티 등에서는 연말정산 팁이라며 '못쓰는 물건을 기부하라'고 소개하기도 한다. 중고 거래가 활성화되면서 판매 가능한 물품은 중고 거래로 가고, 판매가 어려운 물품은 기증품으로 보내는 '나쁜 기부'가 많아졌다.

그러다 보니 기부량은 늘었지만, 실제 판매 가능한 물건은 적다는 게 현장 관계자들의 말이다. 아름다운 가게에 따르면 지난 3년간 평균 60~70%의 물건이 판매될 수 없는 것으로 분류돼 폐기됐다. 기부한 물건이 폐기될 경우 기부자가 세액공제를 받을 수 없을 뿐 아니라, 아름다운 가게 역시 폐기물 처리 비용 등을 떠안게 된다. 아름다운 가게는 판매에 앞서 기증품을 지역별 물류센터에서 선별하고 폐기하는데, 폐기량이 증가하면서 관련 인력을 늘려야 할 상황이 왔다. 아름다운 가게 관계자는 "일손이 부족하기에 별도로 세탁·수선을 하지 못한다"며 "세탁만 해서 보내도 폐기물량을 크게 줄일 수 있다"고 했다. 다만 착용했던 속옷이나 내의류 등은 보관 상태와 관계없이 재판매가 어렵다. 특정 로고가 박힌 단체복 등도 마찬가지다. 개봉했거나 유통기한이 6개월 미만인 화장품도 폐기 대상이다. 아름다운 가게 송창수 정책실장은 "최근에는 재사용 상품에 대한 고객들의 기준이 높아지면서 폐기율 상승에 영향을 미친 것도 있다"고 했다.

실제 재해 현장이라고 해도 지나치게 낡은 헌 옷 등은 이재민들도 선호하지 않는다. 희망브리지 양 주임은 "재난 피해자는 이전까지 우리와 똑같이 일상생활을 하던 분들인데 갑작스럽게 재난 피해를 보신 것뿐"이라며 "낡은 헌 옷 등을 지원받으면 재해로 인한 피해보다 더 충격을 받기도 하고 자괴감을 느끼는 경우도 있다"고 했다.

아프리카 헌 옷 거부 움직임

영국 BBC 등에 따르면 전 세계 헌 옷의 35%가 르완다, 부룬디, 케냐 등 아프리카로 간다. 헌 옷 기부의 종착지이다. 그러나 아프리카 빈국 르완다는 지난해부터 미국 등 서부 선진국에서 오는 헌 옷 반입을 금지하기로 했다. 서구에서 몰려온 헌 옷이 현지의 섬유산업을 무너뜨렸다고 보기 때문이다. 폴 카가메 르완다 대통령은 "헌 옷을 받을지, 섬유 산업을 키울지 선택해야 할 상황이 됐다"며 "이건 우리의 존엄성 문제"라고 했다. 환경 문제도 있다. 아프리카에서도 받아들여지지 않는 헌 옷은 결국 폐기 처리해야 한다. 세계 최대의 폐기물 소각장 50개 중 20개가 아프리카에 있다.

과거 기부는 철저히 하는 사람에게 맞춰졌다. 기부자는 기부를 선택할 수 있어도, 받는 사람은 선택할 수 없었다. 그러나 미국 워싱턴포스트는 지난해 연말을 앞두고 '좋은 기부'와 '나쁜 기부'를 구분하는 방법에 대해 이렇게 썼다.

“받는 사람이 선택자가 될 수 없다는 개념을 무시하라. 사랑하는 사람에게 선물을 줄 때처럼 받는 이에게 집중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