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학 강사 정승제가 새빨간 재킷 차림으로 칠판 앞에 섰다. 마이크를 잡자마자 자동으로 노래를 불렀다. 수학도, 음악도 인생의 일부라고 했다.

캡사이신 뿜어낼 듯한 새빨간 재킷을 입고 수학 강사 정승제(44)가 나타났다. 벽에 걸린 진초록 칠판과 보색을 이뤄 눈이 얼얼하다. '미스터트롯' 탈락의 아쉬움을 달래는 패션인가 물었다. "아하하하. 아닙니다. 콘셉트 없습니다. 저 원래 이렇게 입습니다." 영화 '마스크' 속 짐 캐리처럼 입꼬리를 있는 힘껏 끌어올린 채 말했다. 단어 하나하나 귀에 콕콕 박혔다.

지난달 2일 시작한 미스터트롯 화제 참가자 중 한 명이었다. 과거형이 된 건 미끄러졌기 때문이다. "문투(문자 투표)까지만 버텨주시면 저희가 다 알아서 할게요!" '은혜 픽'(스승의 은혜를 갚으려 하는 투표)'까지 등장할 만큼 제자들이 응원했건만 본선 진출에는 실패했다.

입시와 무관한 이들에겐 낯설지만 수험생에겐 '1타(1등 스타) 강사'로 이름 높다. 2009년부터 EBS와 이투스로 그의 인터넷 동영상 강의를 들은 누적 수강생이 800여 만명. 특히 '수포자(수학 포기자)의 희망'으로 불린다. 첫 방송 나간 날, 영상 클립 댓글 창엔 수포자 탈출기가 넘쳤다. "생선님(정승제 별명) 덕분에 수포자였는데 수학 1등급 받았어요" "무자본 재수생의 한 줄기 빛" "쌤 덕분에 7등급인데 수능 하나 틀렸어요"….

무대에서 내려와 본업으로 돌아간 '수포자의 신'을 만났다. 장소는 그가 소유한 서울 홍대 앞 6층짜리 구름아래소극장 건물. 직접 운영하는 교재 회사 MK에듀테인먼트 사무실과 소극장, 카페, 밥집이 한데 있었다.

쌤이 왜 거기서 나와

―수학 강사와 홍대 앞, 매치가 잘 안 됩니다.

"예전부터 공연장을 만들고 싶었어요. 음악의 아버지가 바흐라는데, 제 꿈이 '인디의 아버지'거든요. 인디 공연의 메카가 홍대잖아요. 2015년부터 자리를 알아보다가 작년에 건물을 지었어요."

―인디의 아버지요?

"10여 년째 수강생 대상으로 콘서트를 열면서 인디 가수를 많이 초청했어요. 지켜보니 노래를 정말 잘하는데 설 무대가 없는 분이 많았습니다. 그들이 맘껏 공연할 공간을 만들고 싶었어요. 좀 자리 잡히면 인디 무료 대관도 생각하고 있어요."

―연초 미스터트롯 출연 때문에 검색창을 달궜습니다. 학생들이 열광했죠.

"댓글 읽다가 내가 뭐라고 이렇게까지 좋아해 주나 싶어 눈물이 찔끔 났습니다. 아, 더 잘해야 했는데…. 조금이라도 날씬하게 보이려고 이틀 굶었더니 소리가 안 나오더라고요. 망했다 싶었습니다. 수능 날 떨어서 시험 망친 애들 심정이 이해 가더군요. 하하."

―온라인에서만 본 '인강(인터넷 강의)' 선생님에게 학생들이 왜 그리 몰입하는 걸까요.

"사실 바람직한 현상은 아니죠. 대한민국의 비극이랄까. 애들이 열아홉 살 때까지 보는 어른이 학교 쌤, 학원 쌤, 인강 쌤, 아이돌 가수, 유튜버, 부모 말고 누가 있습니까. 좁은 경험치 안에서 믿고 따르는 사람에게 의지하는 겁니다. 학원 선생님한테 의지한다? 외국에선 상상 못 할 일이죠."

―방송국에서 먼저 섭외 온 건가요?

"아뇨. 송가인이 인기라기에 강의 중에 뭐 하는 사람이냐고 했더니 미스트롯 1등 한 사람이래요. 미스터트롯 있으면 무조건 나간다 했는데 그 자리에서 조교가 진짜 모집 중이라는 거예요. 참가 자격이 10세부터 45세까지더군요. 제 나이 마흔넷. '오, 되네? 난 노래 못하지만 끝까지 도전해 보겠어. 너희도 수학 포기하지 마' 하면서 덜컥 지원했죠."

오디션이 처음은 아니다. 2001년 인터넷 가요제에 나가 최종까지 간 적이 있다. 그의 음악 사랑은 수강생 사이에선 익히 알려졌다. 노래 부르며 강의 시작하는 게 트레이드 마크. 건물 안 카페, 백반집, 사무실, 인강 촬영 스튜디오엔 언제든지 노래할 수 있게 음향 장비를 갖췄다.

고2 때부터 잡은 분필

―강사는 언제부터 했습니까?

"대학교 2학년 때 동네 수학 보습 학원에서 불법 강사로 시작했어요. 군 복무 때 빼고 쭉 했죠. 2007년 비타에듀에서 인강 데뷔를 했는데 반응이 폭발적이었어요. 2009년 EBS에서 특채했고요. EBS에서 사교육 스타 강사를 적극적으로 영입하던 시절이었어요." 2011년 온라인 강의 전문 업체 이투스로 이적해, 현재는 공영 EBS와 이투스 양쪽에서 강의한다. EBS 인강은 무료, 사설 인강 업체 수강료는 업체마다 차이가 있지만 1년 무제한으로 들을 수 있는 패키지가 대략 20만원대다.

―원래 학원 강사가 꿈이었습니까.

"네. 초등학교 4학년 때 교육 때문에 서울 장안동에서 역삼동으로 이사 왔어요. 그런데 중학교 1학년 1학기 첫 중간고사 수학 시험 성적이 56점이었어요. 아버지가 어머니한테 왜 이런 데로 와서 애를 망쳐놨느냐 하셨죠. 그러다 대치동 학원에서 신세계를 만났어요."

친구들은 과학자, 대통령을 꿈꾸던 고2 때 정승제는 스타 수학 강사를 꿈꿨다고 했다. “분필 하나로 수강생 수백명을 들었다 놨다 하는 모습이 어찌나 멋지던지요.” 꿈은 이뤄졌다. 12년간 그의 입은 800만명(온라인 누적 수강생 수)의 시선을 끌었다.

―어땠기에요.

"1989년 대치동에 200~300명 들어가는 중학생 대상 대형 단과 학원이 막 생겼을 때였어요. 한 강의를 들었는데 1학기 내내 이해 못 했던 수학 개념을 한 시간 만에 깨쳤어요. 그 뒤로 중3 때까지 수학을 하나도 안 틀렸어요. 내가 머리가 나쁜 게 아니구나, 전달자가 중요하구나 깨달았죠. 전달자 역할을 동경하기 시작했어요."

고2 때 또 다른 운명의 선생님을 만났다. "그분이 무명 시절 수강생 3~4명일 때 수업을 들었어요. 1년 만에 400~500명 들어가는 제일 큰 강의실을 접수하더군요. 제 성적도 확 올랐고요. 그 쾌감이란!" 그때 진로를 결정했다. 친구들은 과학자, 대통령이 꿈이라고 할 때 학원계를 제패하겠노라 공언했다. 점심시간, 전날 학원에서 배운 내용을 반 친구들에게 가르쳤다. "따지고 보면 분필 잡은 건 고2 때부터예요(웃음)."

―학교 수학 교사가 될 수도 있었을 텐데.

"군중의 시선을 한 몸에 받는 일에 더 끌렸어요. 수백 명이 학원 강사 한 명을 쳐다보고 따라오는 게 얼마나 멋지던지요. 프로야구 LG트윈스 팬이었는데 당시 정석진 응원단장이 잠실구장에서 손가락 하나로 3만명을 움직이는 걸 보고 전율 느껴 응원단장도 되고 싶었다니까요. '관종' 기질이 다분했죠(웃음)."

―학창 시절 모범생이었나요.

"특이한 애였어요. 점심 땐 수학 가르치고 그 외엔 야구 얘기만 했어요. 타격 1위부터 30위까지 줄줄 외우고. 30초에 정보 이용료 얼마 내면 프로야구 결과 얘기해주는 700 음성 정보 서비스가 있었어요. 거기다 계속 메시지를 남겼더니 그쪽에서 저한테 전화가 올 정도였어요. LG 팬인데 두산베어스 곰돌이 인형 쓰고 알바도 했어요. 제가 그래서 알아요. '펭수' 노고를. 하하." 'EBS 동지' 펭수와 친분이 두텁다. 지난해 11월 수능 직전엔 같이 수험생 응원 이벤트도 했다.

―학생들이 '생선님'이라 부르더군요. '선생님'이 아니라.

"7년 전 EBS 강의하는 학교 선생님이 '우리 반에 수학여행비 못 낸 친구가 있어 몰래 내줬다, 내가 준 걸 알면 기분 상하지 않을까' 고민하더군요. 그때 애들한테 말했어요. 정말 여러분 미래를 생각하는 진정한 선생님은 학교에 계신다, 나는 어떻게 하면 수학 지식을 효과적으로 판매할까 고민하는 사람이다, 선생님이라 부르지 마라, 차라리 생선님이라 부르라고."

EBS에서 번 수입은 전액 장학금으로 쓴다. "EBS 강의로 속세(사교육 시장)에 찌든 나를 정화하는 기분"이라고 했다. 지난해부터 홍대 건물 소극장에서 200명에게 무료 현장 강의도 한다. 선발 기준은 절실함. 지방에서 KTX 타고 올라오는 학생, 스물여덟 살 늦깎이 수험생도 있다. 하루라도 결석하면 인증을 끊고 다음 대기자에게 기회를 준다. "수포자들에게 희망을 주려고" 11년째 '위너스 클럽'이란 프로그램도 운영하고 있다. 원래 잘하는 학생이 아니라 성적이 많이 오른 학생에게 장학금을 준다.

대치동이 수학포비아 키웠다?

미스터트롯 출연 장면.

그의 커리큘럼은 기본 개념을 강조한다. '정승제 개때잡(개념 때려잡기)'이 대표 강의다.

―수업이 왜 수포자에게 특히 인기가 많은가요.

"기본 개념을 충실히 알려줘 수포자에게 적합한 수업이라는데 저는 그렇게 생각 안 합니다. 제대로 개념 아는 학생은 문·이과 합쳐 전국에 1~2%밖에 안 돼요. 98%는 몰라요. 심각합니다. 다들 선행한다는데 중학교 수학 기본 개념도 모르는 고등학생이 태반입니다. 중3 때 중3 과정도 이해 못 하면서 고1 과정을 선행해요. 결국 중3, 고1 수학 다 놓칩니다."

"구멍 뚫린 물잔에 계속 물을 붓는 격"이라고 했다. "고3 되기 전 부끄러워하지 말고 기초 개념을 다잡아 밑바닥을 채워야 합니다. 그러면 고3 됐을 때 우아하게 살짝 물을 따르기만 해도 채워집니다. 개념으로 밑바닥을 다지고, 기출 문제로 트렌드를 분석한 다음 문제 풀이 연습하기."

―그런데 학원 가면 상위권 얘기만 합니다.

"진정한 상위권은 1% 정도라고 봅니다. 나머지는 상위권이 되고 싶어 할 뿐이죠. 기초도 이해 못 하는 학생이 많다는 걸 학교 선생님도 학원 강사도 알아요. 그런데 못 건드려요. 학교 선생님은 진도 맞춰야 하니 자세히 가르칠 시간이 없어요. 학원은 기본 개념에 손대면 망합니다. 수준 낮은 수업 한다면서 애들이 학원을 관두니까."

―수포자가 왜 그리 많습니까.

"막연한 공포심, 수학포비아가 퍼져 있어요. 제대로만 알면 누구나 1등급 받을 수 있어요. 정말, 정말입니다. 대치동 아파트 값이 저렇게 올라갈 만큼 대치동 학원에 다녀야지만 되는 게 절대 아닙니다. EBS 무료 인강만 들어도 돼요. 대치동까지 이사 가서 학원 끊고 선행 돌리는 건, 부모의 책임 회피일지 몰라요. 부모로서 지원해줄 만큼 다 했으니 성적 안 나오는 건 너희 책임이야, 하는 것 아닌가요. 저는 이렇게까지 집값이 미쳐 날뛰는 건 역대 정부 탓도 아니고 학부모 탓이라고 봅니다." 데시벨이 커졌다.

―학부모 탓이라고요?

"정확히는 학부모와 선행을 조장하는 대치동 학원가 상담실장. 그들의 연합이 우리나라 교육을 망쳐놓고 아파트 값을 다 키워놨어요. 강사들이 대치동에 학원 낼 때 제일 먼저 '이빨 센 상담실장 어디 없느냐'고 주변에 묻습니다. 상담실장이 뭐 하는 사람이냐, 불안감 조성하는 사람입니다. 애가 중2라고 하면 '고1 수학 과정 어디까지 끝내놨느냐'고 물어요. '중3 과정 한다'고 하면 '어머 어머, 어머니 애를 왜 그렇게 망가뜨리세요' 합니다. 엄마들은 '큰일 났네' 하면서 가슴 치고. 다 알아요. 비정상이라는 거."

―그런데 왜 그럽니까?

"돈 때문이죠. 고1 되기 전, 진도 다 빼서 정석 두 바퀴 돌려야 한다고 해요. 말도 안 되는 얘기 때문에 애들은 문제를 닥치는 대로 풉니다. 왜 문제를 이렇게 풀어야 하는지 생각할 겨를도 없이. '사고력'이 아니라 공식 달달 외워 '기억력'으로 풉니다."

―당신도 대치동 학원의 수혜로 수학에 눈떴다고 하지 않았나요.

"모든 학원이 나쁜 게 아닙니다. 맹목적 선행 학습, 진도 빼는 데 급급한 게 문제예요. 그건 범죄입니다. 멈추고 '본질'을 직시하는 용기가 필요해요. 자기는 이걸 준비할 때가 아니란 걸 알면서 남들 다 하니 우르르 휩쓸려 가서는 안 됩니다."

―본질을 본다?

"김밥집 창업을 준비할 때 대부분 유동 인구부터 봅니다. 역세권 확인하고. 김밥집 차린 다음엔 마케팅에만 신경 쓰죠. 정작 중요한 본질은 김밥을 맛있게 만드는 건데. 제가 백종원씨를 그래서 좋아합니다. 맛, 위생부터 말해요. 본질을 얘기하죠. 수학도 그렇습니다. 본질, 즉 개념부터 봐야 합니다."

수학은 인생이다

―자신이 타고난 전달자 같습니까.

"답답함이 전달을 잘하도록 만드는 것 같습니다. 수학에 대한 아이들의 잘못된 생각부터 교정해야겠다는 생각에 열을 뿜습니다. 그걸 보고 애들이 '어 웃긴다, 잘 가르친다' 해요(웃음)." 호통과 유머, 격정이 뒤범벅된 그의 강의는 수험생들 사이 졸음 퇴치용 콘텐츠로도 인기다.

―왜 수학을 배워야 합니까.

"우리 삶이 판단의 연속입니다. 오늘도, 내일도 판단을 내립니다. 수학을 통해 객관적으로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능력을 기를 수 있습니다."

―수학 공식을 인생에 빗대 종종 설명하던데요. 삶의 지혜가 담긴 수학 개념 하나만 꼽는다면요?

"부등식인데 극한을 구하면 등호가 생길 때가 있어요. A가 B보다 늘 돈 많고 훨씬 더 잘나가는 것처럼 보이는데 인생의 최종 순간, 죽음 앞에선 결국 같아요. 다른 사람 이기려고 안간힘 쓰는 게 덧없다는 교훈을 극한이 보여줍니다."

―이제 '음포자(음악 포기자)'가 되는 건가요(웃음).

"대안이 없어야 경쟁력이 생기는데 음악은 저보다 훌륭한 대안이 너무 많습니다. 직업으로는 못 합니다. 그래도 사랑은 놓치지 않을 겁니다." 6일 육중완밴드와 함께 음원 둘을 공개한다. 제목은 '잘될 거야' '생선님의 편지'. 학생들에게 바치는 노래다

그에게 좋아하는 숫자를 물었다. "몇 자리 숫자요? 자연수, 유리수, 무리수 어떤 수요?" 수포자의 우문(愚問)이었다. "한 자리 자연수 중 좋아하는 숫자요." 고쳐 물었다. "3. 통통한 게 예쁘잖아요. 사회인 야구 등번호도 3입니다." 다시 보니 숫자 3을 묘하게 닮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