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창균 논설주간

집권 세력의 설 명절 건배사는 ‘유쾌, 통쾌, 상쾌’가 아니었을까. 촛불 정권을 거역한 윤석열 검찰을 응징하고 연휴를 맞이했으니 얼마나 속이 후련했겠나. 지지층의 흥겨운 분위기가 설 직전 서초동에서 열린 ‘조국 수호’ 집회에서 연출됐다. 진행자가 “(윤석열의) 손발을 모두 잘라냈다. 이제 물도 못 떠 먹는다”고 하자 우렁찬 환성이 터져 나왔다.

설마하니 자신들의 범죄를 수사하는 검찰 라인을 손댈 수 있겠나 싶었는데 이 정권은 눈 하나 깜짝 않고 해치웠다. '민주화 정권'이 밀어붙이는 1·2차 학살 인사를 보면서 부마사태 시위대를 "탱크로 밀어 버리면 된다"고 했던 차지철의 야만이 떠올랐다. 해도 되는 일과 안 되는 일을 구분하지 못하는 건지, 양심과 염치가 없는 건지, 그런 앞뒤 사정을 가릴 수 없을 만큼 사정이 다급했던 건지 보통 사람 머리로는 헤아릴 길이 없다.

물도 제 손으로 못 떠먹게 된 검찰의 칼날을 누가 무서워하겠나. 검찰 수사에 움찔해서 몸을 숨겼던 권력 실세들이 경보 해제 사이렌을 듣고 슬금슬금 방공호를 빠져나오고 있다. 검찰에 쫓기던 정권이 이제 칼자루를 바꿔 쥔 기세다. 검찰에 기소된 청와대 비서관이 "공수처가 출범하는 대로 윤석열 세력을 손보겠다"고 엄포를 놓았다. 피의자가 검찰에 보복하겠다고 협박하는 세상이다. 지난 몇 달, 법을 깔고 앉은 권력의 위세를 생생하게 목격했다. 눈앞에서 전개되는 유권무죄(有權無罪), 무권유죄(無權有罪) 실화 드라마가 보수 정권의 횡포를 과장해서 1000만 관객을 모았던 좌파 영화보다 훨씬 섬찟하다.

유신 말기 뺨치는 막장극을 펼치는 정권의 배짱은 어디서 나왔을까. 권력을 겨냥한 검찰 수사를 권력으로 제압하는 실험에 성공했다. 권력만 손에 쥐고 있으면 자신들의 범죄를 뭉갤 수 있다는 자신감이 붙었다. 민변 공수처, 검경 수사권 조정 같은 2중, 3중의 안전장치도 마련했다. 대선에서 민주당 후보가 이기기만 하면 국정 농단을 없던 일로 만들 수 있다는 계산이 섰다. 정말 그럴까.

2003년 3월 15일, 취임한 지 한 달도 안 된 노무현 대통령은 4000억원 대북 송금 의혹을 수사할 특검법을 공포했다. 정권 재창출에 성공했다고 안도했던 김대중 정부는 뒤통수를 얻어맞았다. 대북 송금 문제를 "털고 지나가야 한다"고 바람을 잡은 건 DJ 정부서 정무수석을 지낸 문희상 비서실장이었다. 그런가 하면 노태우 대통령은 자신을 후계자로 지목하고 밀어준 육사 동기 전임자를 취임 첫해에 백담사에 보냈다. 두 대통령의 성정이 야박해서 그랬겠는가. 전 정권이 남긴 흠집을 덮어 주다간 자신들도 함께 늪에 빠져들까 겁이 났기 때문이다.

문재인 대통령의 정치적 동지들은 차기 대선 주자군에서 사실상 탈락 상태다. 조국 전 법무부 장관은 가족 일가 비리로 만신창이 신세고, 유시민씨는 '조국 수호 투쟁'의 선봉에 서서 개그에 가까운 궤변을 늘어놓다가 웃음거리가 됐다. 김경수 경남지사는 드루킹 댓글 조작 혐의로 2차 선고를 앞두고 있는데 재판부는 "김 지사가 댓글 조작 프로그램 시연을 봤다는 사실은 인정된다"고 유죄 취지 복선을 깔아놓았다. 민주당 주자는 현재 압도적인 선두인 이낙연 전 총리, 그리고 후보군으로 박원순 서울시장, 이재명 경기지사 정도다. 문 대통령과 친문 진영을 위해 자기희생을 감수할 인연은 없는 사람들이다.

검찰은 와신상담, 절치부심 2년여 남은 대선 날까지 참고 기다린다는 자세다. 좌천 인사로 밀려난 검찰 간부들은 대부분 사표를 내지 않았다. 윤석열 총장과 고난의 행군을 함께하며 버티겠다는 거다. 정권의 횡포를 보다 못한 선배 검사는 "봉건적 명(命)에 거역하라"는 말을 남기고 사표를 던졌고, 후배 검사 600명은 "남아 있는 저희가 어떻게 하는지 지켜보시라"는 댓글을 달았다. 이 정권은 검찰 조직 전체를 원수로 돌렸다. 검찰 수사팀은 쫓겨나는 마지막 순간까지 문 정권 범죄의 증거와 기록을 남겨 놓았다. 수사가 재개될 때 '보물'을 쉽게 찾기 위한 지도다. 검찰 수사는 중단됐지만 범죄의 뇌관은 그대로 남아있다. 시한폭탄의 초침이 잠시 멈췄을 뿐이다.

2002년 대선을 앞두고 노무현 민주당 후보는 대북 송금 의혹에 대한 질문을 받고 “법대로 엄정 처리할 것”이라는 답변을 내놓을 수밖에 없었다. 2년 후 대선에서 여당 후보가 어떤 질문을 받고 어떤 답을 내놓을지도 정해진 이치다. 5년 왔다 가는 정권이 권력의 힘으로 자신의 업보를 덮을 수 있다고 믿었다면 대한민국이라는 나라, 그 나라의 5100만 국민을 너무 우습게 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