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이 차고 있는 건 단지 손목시계가 아니다."

시계를 눈앞에 두고 시계가 아니라고 말한다. 그저 손목시계라 불리는 걸 거부한다는 뜻이다. 시간을 알려주는 전통적 의미의 '시계'는 이제 설 자리를 잃었다. 지난 12~14일 두바이에서 열린 '제1회 LVMH워치위크(Watch Week)'에서 만난 LVMH(루이비통모에헤네시) 그룹 내 두 CEO는 입을 모아 "시계를 사는 건, 도전하는 인간의 가치를 사는 것"이라 정의했다. 주인공은 LVMH 시계 부문(태그호이어·위블로·제니스)을 총괄하는 스테판 비앙키 총괄 CEO와 이탈리아 시계·보석 브랜드 불가리의 총괄 CEO인 장 크리스토퍼 바뱅. "고급 시계는 이제 예술품의 경지에 이르러 (크리스티 등) 각종 경매에 등장하고 있고, 매년 신제품을 내놓을 때마다 올림픽처럼 각종 기록 경신, 인간 한계의 도전 같은 수식어가 따라붙지요. IT, 패션, 미술, 자동차 등 경계 없는 협업 시대에서 인재를 빠르게 확보할 수 있는 회사가 결국 시계 분야도 휘어잡을 겁니다."

두바이에서 ‘제1회 LVMH워치위크’를 연 스테판 비앙키(사진 왼쪽) LVMH 시계부문 총괄 CEO와 불가리 장 크리스토퍼 바뱅 CEO.

두 사람은 "시계 업계의 판도를 바꿔 리더가 돼보자"고 의기투합해 이번 행사를 기획했다. 매년 3월 열리던 세계 최대 시계박람회인 '바젤월드'가 올해부터 5월로 늦춰지자, 경쟁사인 스와치 그룹이나 까르띠에 등을 보유한 리슈몽 그룹보다 빠르게 신제품을 선보여 시장을 선점한다는 작전이다.

태그호이어에 이어 불가리를 이끄는 바뱅은 시계 업계의 스타 CEO. 그러나 지난해 LVMH로 옮겨와 LVMH 시계 부문 총괄 CEO를 맡은 비앙키는 시계와는 인연이 없었다.

금융 컨설턴트 출신인 그는 업계에서 'CEO 키워내는 CEO'로 알려져 있다. 비앙키는 1998년부터 2015년까지 프랑스 2위 화장품 그룹 이브 로셰 CEO를 맡아 매출 규모 25억유로(약 3조2400억원)에 전 세계 88국에 진출한 글로벌 회사로 성장시켰다. 이브 로셰 창업자의 손자 브리 로셰가 아버지의 갑작스러운 사망으로 16세 때 승계받게 되자 브리의 정신적 스승이자 경영 선생이었던 비앙키가 이브 로셰 CEO를 맡았고, 브리 로셰가 31세에 정식 CEO 자리에 오를 때까지 비앙키는 그룹 M&A 등을 주도하는 등 회사의 내실과 외형을 다졌다.

왼쪽 시계는 무지개가 손목에 앉은 듯한 ‘스피릿 오브 빅뱅 레인보’. 오른쪽 시계는 극도로 크기를 줄인 투르비용으로 한계에 도전한 불가리 ‘세르펜티 세두토리 투르비용’.

비앙키는 부임하자마자 시계 공방이 있는 스위스 뉴샤텔로 이사해 말단 직원부터 장인들까지 차근차근 만났다. 그는 "최고급 시계에서도 IT 커넥티드 워치(스마트 시계) 못지않은 실험과 도전이 필요하다는 것을 보고 배웠다"고 강조했다. 예를 들어 위블로가 새롭게 내놓은 '클래식 퓨전 골드 크리스털' 시계는 24K 골드를 녹인 뒤 이를 급속 냉각할 때 만들어진 금 결정을 모아 시계 자판 위에 뿌리는 방식이다. 20회 정도 반복해 층층이 쌓아 모양을 만든다. 동굴에 종유석이 맺히듯 자판에 켜켜이 오른 금 결정은 누구도 복사할 수 없고 세상에 똑같은 작품도 없다.

불가리가 내놓은 여성용 '세르펜티 세두토리 투르비용' 시계에는 세상에서 가장 작은 투르비용(tourbillon·시계 정확성을 위해 중력의 오차까지 줄이려고 만드는 장치)이 들어간다.

손목 위 미학적 가치를 극대화하기 위해 부품 크기를 줄이고 줄여 현미경으로나 겨우 볼 수 있는 크기로 만들어가는 것이다. 시곗줄 하나도 착 감기는 듯한 질감을 내기 위해 장인들, 인체공학 기술자들과 4년 넘게 실험하는 게 보통이다. 기계가 하는 게 더 정확할 것 같지만 눈에 보이지 않는 수백 개의 미세한 부품을 쌓고 붙이고 또 먼지를 없애는 일을 반복하는 건 사람 아니면 할 수 없는 일이란다. 바뱅은 "세상에서 가장 효율적인 회사는 떠난 인재들도 돌아오고 싶게 만드는 회사"라며 "상품보다 더 중요한 게 사람이고, 그 인재들의 혼이 담긴 게 바로 시계"라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