판사 블랙리스트, 강제징용 판결 고의 지연 의혹 폭로했던 판사들 총선행
최순실 국정농단, MB 정부 민간인 사찰 등 前 정권 의혹 폭로자들도 출마 선언
"정의 실현 위해 출마" 주장… "결국 자기 정치 위한 폭로였나" 비판론도

왼쪽부터 이수진 전 부장판사, 최기상 전 부장판사, 이탄희 전 판사

4⋅15 총선을 80여일 앞두고 전(前), 전전(前前) 정부 시절 정권이나 사법부, 대기업의 부조리 등을 폭로했던 내부 고발자들이 잇달아 총선 출사표를 던지고 있다. 양승태 전 대법원장 시절의 사법행정권 남용을 폭로했던 전직 판사들이 더불어민주당 인재 영입 대상에 이름을 올렸고, 이명박 정부의 민간인 불법 사찰 의혹을 폭로한 전직 공무원도 민주당 후보로 출마를 준비 중이다. 이들은 저마다 국회에 들어가 정의를 실현하겠다는 명분을 들고 있지만, 폭로의 목적이 결국 금배지였느냐는 곱지 않은 시선도 일고 있다. 내부 고발자들의 총선 출마가 앞으로 있을 공익 제보에 대한 사회적 신뢰를 훼손시킬 것이란 지적도 나온다.

◇'양승태 대법원' 폭로자들 민주당 옷 입고 출마 채비

민주당은 지난 19일 이탄희 전 판사 전 판사를 영입했다. 이 전 판사는 2017년 법원행정처 심의관으로 재직할 당시, 대법원이 판사들 뒷조사를 해 '블랙리스트'를 만들었다는 의혹을 제기하며 사직서를 냈다. 그의 폭로를 계기로 사법행정권 남용 사건에 대한 검찰 수사가 시작됐고 결국 양승태 전 대법원장 구속 사태로 이어졌다. 양 전 대법원장이 구속되자 사직서를 제출하고 법원을 나온 그는 현 정부 법무부 제2기 법무·검찰개혁위원회 위원으로 위촉돼 활동했다.

이수진 전 수원지법 부장판사와 최기상 전 서울북부지법 부장판사도 민주당 영입 제안을 받고 총선 출마를 준비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이 전 부장판사는 지난 2018년 8월 방송 인터뷰에서 "양승태 대법원이 강제징용 판결을 고의로 지연했다"고 의혹을 제기한 인물이다. 최 전 부장판사는 사법행정권 남용 문제를 제기하며 법원행정처의 사법농단을 앞장서 비판해왔던 인물이다. 이 두 사람은 이탄희 전 판사와 달리 총선 지역구 출마자 공직사퇴 시한(1월16일)에 임박해 법복(法服)을 벗었다. 이들이 총선에 출마한다면 판사가 최소한의 냉각기도 없이 총선으로 직행하는 사례로 기록된다.

◇최순실 국정농단, MB정부 민간인 사찰, 땅콩회항 사건 고발자도 총선행

왼쪽부터 노승일 K스포츠재단 부장. 장진수 전 행정안전부 장관 정책보좌관. 박창진 대한항공 직원연대 지부장. 이 세 사람은 모두 올해 총선 출마를 준비 중이다.

이명박 정부의 민간인 불법사찰 증거인멸 사건을 폭로한 장진수 전 행정안전부 장관 정책보좌관도 지난 13일 국회 정론관에서 민주당 후보로 경기 과천·의왕 선거구에 출마하겠다고 선언했다. 장 전 보좌관은 총리실 주무관(6급)으로 있던 2012년 3월 언론을 통해 "2010년 청와대가 총리실의 민간인 사찰에 개입하고 증거를 없앴다"고 폭로한 인물이다. 이 폭로는 검찰이 2008년 처음 불거졌던 민간인 불법 사찰 사건을 재수사하는 계기가 됐다.

장 전 주무관은 2013년 11월 대법원에서 민간인 불법 사찰 증거를 없앤 혐의(증거인멸 등)로 징역 8개월에 집행유예 2년이 확정되면서 파면됐다. 이후 2014년 권은희 당시 새정치민주연합 의원(현 바른미래당) 입법보조원, 전국공무원노조 연구원 등을 거쳐 2017년 초 문재인 대통령의 대선 캠프에 합류했다. 지난 대선에서는 '더문캠' 총무지원팀장을 맡았다. 현 정권 출범 후 행안부 장관 정책보좌관(별정직 3급)을 거친 그는 지난달 31일 사직하고 민주당에 입당했다.

'최순실 국정농단 사태' 때 최씨 관련 폭로를 했던 노승일 전 K스포츠재단 부장은 광주 광산을에 출마한다. 노씨는 지난 2016년 최순실 국정농단 사건 국회 국정조사와 관련 재판에서 "최씨가 삼성 돈을 먹으면 탈이 없다고 했다"는 등 최씨의 행적을 구체적으로 폭로했다. 그는 지난해 7월 '공익제보자로서의 삶 비하인드'라는 제목으로 민주당 청년위원회 세미나에서 강연도 했다. 그는 "당선되면 민주당에 입당하겠다"고 했다.

조현아 전 대한항공 부사장의 '땅콩 회항' 사건을 폭로한 박창진 대한항공직원연대 지부장은 지난 22일 정의당 국회의원 비례대표 경선에 출마한다고 밝혔다. 전두환 전 대통령의 골프 동영상 등을 공개한 임한솔 전 정의당 부대표도 총선 출마를 준비 중이다. 서울 서대문구 구의원으로 활동해온 임 전 부대표는 정의당이 총선 출마를 허락하지 않자 정의당을 탈당했다.

◇"결국 의원이 목표였나"… 내부고발자 출마 러시에 비판론도

이른바 내부 고발자로 이름을 알린 인사들의 총선 출마 러시에 비판론도 만만치 않다. 이들의 내부 고발을 지지했던 인사들 사이에서도 "사회 정의(正義)를 내세우며 폭로에 앞장섰지만 결국 자기 정치를 했던 것이냐"는 말이 나오고 있다. 진중권 전 동양대 교수는 이탄희 전 판사의 여당행 소식에 "민주당이 공익제보를 의원 자리랑 엿바꿔 먹는 분을 인재라고 영입했다"며 "이런 분이야말로 출세주의와 기회주의라는 당의 이념과 가치를 제대로 보여주는 카드"라고 했다.

특히 과거 사법부의 행정권 남용 의혹을 앞장서 폭로했던 판사들이 여당 옷을 입고 출마하려는 데 대해서는 사법의 정치화를 우려하는 목소리도 크다. 김형준 명지대 교수는 "내부 고발자나 공익 제보자들이 여당 공천을 받아 총선에 출마한다면 그들이 했던 내부 고발의 의도가 순수했다 해도 목적성을 의심받을 수밖에 없다"며 "특히 공직 사퇴 시한에 임박해 옷을 벗고 총선에 뛰어드는 판사들은 사법의 정치화 논란을 부를 것"이라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