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상훈 주필

작은 기업을 힘들게 운영하다가 최근 사업을 접은 한 분은 기업 경영을 고문(拷問)이라고 했다. “사람을 고문하고 싶으면 때리고 찌르고 할 필요가 없다. 그 사람에게 작은 기업 하나 맡기면 매달 직원 월급날 즈음 해서 차라리 죽었으면 좋겠다는 고통을 반복적으로 당하게 된다.” 월급날이 내일모레인데 돈이 없으면 우선 잠이 전혀 오지 않는다고 한다. 이렇게 며칠 가면 ‘도망가고 싶다’ ‘다 끝내고 싶다’는 심리적 유혹이 점점 커진다.

다른 기업인은 그 유혹에 져서 차를 몰고 어떤 저수지로 갔다고 한다. 액셀러레이터를 끝까지 밟으면 모든 고통에서 벗어난다. 가속기를 밟고 차가 도로를 가로질러 저수지로 향하는 순간 맞은편에서 대형 트럭이 돌진해왔다. 그는 본능적으로 핸들을 돌려 트럭을 피했다. 그러고선 '죽을 각오로 한 번만 더 해보자'고 생각을 바꿨다. 이런 얘기엔 아무런 과장이 없다. 그들 표정을 보면 이 나라에서 기업을 경영하는 분 모두에게 훈장을 드리고 싶다는 생각이 절로 든다. 한 대기업 임원은 "과거엔 신기술로 제품화에 성공하면 최소한 2~3년은 먹고살았다. 그런데 이제는 6개월도 못 간다. 정말 힘들다"고 했다. '피를 말리고' '졸면 죽는' 게 글로벌 기업 경쟁의 세계다. 한국에서 기업 경영에 드는 엄청난 노력과 그에 따른 스트레스는 개인적 이익 추구 차원을 넘어서 있다.

이들의 피와 땀은 결국 세금으로 바뀐다. 작년에 기업이 낸 법인세는 80조원에 육박한다. 전체 세수에서 차지하는 비율이 OECD 2위다. 삼성전자의 법인세율은 라이벌 인텔의 2.4배에 달한다. 기업의 피와 땀을 짜서 나라에 세금으로 바치고 있다. 기업만이 아니다. 최근 10년간 근로자들이 낸 근로소득세는 무려 3배가 됐다고 한다. 10년간 월급은 3배가 되지 않았다. 근로자들도 피와 땀을 짜서 세금을 내고 있다.

국민이 낸 세금으로 공무원들이 월급을 받는다. 방역, 소방, 경찰, 군인, 민원 등 현장에서 진짜 고생하는 공무원이 많이 있다. 이들을 위한 세금은 아깝지 않다. 그러나 개인이든 기업이든 직접 만들고 팔아서 돈을 벌어 먹고사는 사람들의 고난과 스트레스는 무조건 월급이 나오는 공무원들보다 훨씬 클 수밖에 없다. 그런 국민들에게 세금을 받아 생활하는 공무원들에게는 좀 더 특별한 모럴(도덕)이 요구된다.

국민이 공무원에게 요구하는 모럴은 대단한 것이 아니다. 이제 '멸사봉공'하는 시대도 아니다. 공무원들이 부정부패하지 말고 나태하지 않았으면 하는 정도일 것이다. 공무원의 대표인 대통령은 고용주인 국민 앞에서 이 두 가지는 항상 약속해야 한다. 부패하지 않고 열심히 일하겠다는 맹세다.

부패한 공무원인 유재수를 구해주는 데 문재인 대통령의 측근들이 총동원됐다. 문 대통령은 다 알고 있었을 것이다. 대통령이 유재수 부패를 눈감더니 이제는 공무원들도 일 좀 살살 하고 인생의 여유를 누리자고 한다.

문 대통령은 그제 20~30대 신임 공무원 11명과 점심을 함께하는 자리에서 모두 발언을 통해 "공무원이 국민을 위해 자신을 다 버리거나 희생해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고 했다. '최대한 열심히 일하되'라는 전제가 있었지만 강조점은 '희생하지 말고'와 '충분한 휴식' '자유 시간'에 있었다. 공표됐으면 하는 메시지도 바로 그거였다. 요즘 공무원에게 일방적으로 희생하라는 국민은 없다. 그러나 월급 주는 고용주(국민)가 뻔히 보는 앞에서 근로자 대표가 새로 들어온 근로자들에게 헌신하지 말고 휴식하고 자유를 가지라는 것은 도리에 맞는 말인가. 국민은 공무원에게 월급 주기 위해 잠도 못 자고 고문과 같은 고통을 당하며 녹초가 돼 있는데 그 앞에서 할 말은 아니다.

문 대통령은 "공무원들은 자신부터 행복할 권리가 있다"고 했다. 대통령 당부가 아니라도 이미 그렇다. 공무원 시험 경쟁률이 심지어 100대1에 이르는 것이 무얼 의미하나. 자영업이 붕괴하고 40대 가장들이 일자리를 잃고 늘어나는 것은 60대 알바뿐인 현실에서, 안정되고 월급도 결코 적지 않은 공무원은 이미 행복하다. 문 대통령은 공시 열풍에 대해서도 뭐 어떠냐고 하더니 "공직 선택도 자기 자신을 위한 것"이라고 했다. 문 대통령 인식 속에 공무원은 있는데 뼈 빠지게 세금 내서 공무원 월급 주는 국민은 없다. 문 대통령은 세금 내는 사람들에 대한 존중심을 표한 적이 없다. 그냥 '닥치세(닥치고 세금)'다. 세금으로 돈 받는 사람들을 향한 인기 발언만 한다.

‘일’과 ‘개인적 삶’의 균형은 사회가 지향해야 할 목표다. 하지만 우리는 아직 그럴 처지가 아니다. 쓰는 것보다 버는 데 더 치중해야 한다. 사회 풍조가 ‘워라밸’로 가더라도 누군가는 ‘일하자’고 해야 한다. 10%가 주 52시간을 누리는 대가로 90%는 더 열악해질 수 있다고 경종을 울려야 한다. 대통령은 어느 쪽에 서야 하는 사람인가. 그런데 대통령이 오히려 공무원에게도 ‘워라밸’ 하자고 한다. 그렇게 얻은 표가 쌓이는 그 높이만큼 우리 사회의 미래는 작아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