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순사건 당시 반란군에 협조했다는 이유로 무고하게 희생된 철도기관사에게 법원이 무죄를 선고했다. 그의 명예회복까지는 무려 72년이 걸렸다.

광주지법 순천지원 형사1부(재판장 김정아)는 20일 여순사건 민간인 희생자 재심 선고공판에서 철도기관사로 일하다 처형당한 고(故) 장환봉(당시 29세)씨에게 무죄를 선고했다.

20일 광주지법 순천지원에서 열린 여순사건 민간인 희생자 재심 재판에서 고(故) 장환봉씨의 딸 장경자(왼쪽)씨와 아내 진점순(97)씨가 무죄를 선고받고 기뻐하고 있다 재판부는 1948년 여순사건 당시 반란군에 협조했다는 이유로 억울하게 사형당한 장환봉씨의 재심에서 무죄를 선고했다.

장씨는 1948년 10월 여순사건 당시 철도기관사로 반란군에 동조했다는 이유로 계엄군에 체포돼 22일만에 처형됐다.

이후 2007~2008년 여순사건을 다시 들여다본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는 군(軍)과 경찰이 438명의 순천지역 민간인을 무리하게 연행해 살해했다고 결론냈다. 이에 장씨의 딸은 2013년 아버지의 억울한 누명을 벗기겠다며 재심을 청구했고, 대법원은 7년여 만인 지난해 3월 21일 재심 개시를 결정했다.

재판을 맡은 김 부장판사는 주문을 읽기에 앞서 "사법부 구성원으로서 이번 판결의 집행이 위법한 공권력에 의한 것이었음을 밝히며 깊이 사과드린다"며 "여순사건 희생자들과 명예를 회복하기 위해 고단한 절차를 더는 밟지 않도록 특별법이 제정돼 구제받을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란다"고 했다.

그는 1948년 당시 군법회의에서 장씨에게 적용한 내란과 국권문란 혐의에 대해 모두 "범죄사실의 증명이 되지 않았다"며 무죄를 선고했다. 무죄 판결 배경을 설명하던 김 부장판사는 한때 울먹이며 말을 잇지 못했다. 그러자 방청석에서는 박수가 터져 나왔다.

김 부장판사는 "장환봉은 좌익, 우익이 아니라 명예로운 철도공무원으로 기록될 것"이라며 "70여년이 지나서야 (판결이) 잘못됐다고 선언하게 됐는데, 더 일찍 명예로움을 선언하지 못한 것에 사과드린다"고 말했다.

무죄가 선고되자 자리에 있던 유족과 시민단체, 시민 등 70여명이 손뼉을 치며 환호했다. 장환봉씨의 딸 장경자(75)씨는 "만시지탄이다. 아버지의 억울한 죽음이 헛되지 않도록 노력했는데 좋은 결과가 나와서 기쁘다"며 "국가가 이제야 늦게나마 사과를 했는데 여순사건 특별법이 하루빨리 제정돼 억울한 누명을 풀어주길 바란다"고 말했다.

여순사건은 1948년 여수에 주둔하던 국방경비대 제14연대 소속 군인 일부가 제주 4·3 사건 진압을 위한 제주 출병을 거부하면서 발생됐다. 1948년 4월 3일 제주도에서 4·3사건이 발생하자 국방경비대는 여수에 주둔 중이었던 14연대 1개 대대를 파견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소속 군인들은 이에 반대했고, 결국 반란을 일으키게 됐다. 여기에 일부 좌익계열의 시민들이 봉기했고, 전남 동부권 6개 군을 점거했다. 정부는 대규모 진압군을 파견해 일주일여만인 10월 27일 전 지역을 수복했고, 그 과정에서 인명·재산 피해와 함께 무고한 민간인과 군경 일부도 희생됐다.

한편, 장씨와 함께 재심 재판 피고인이었던 신모씨 등 2명은 재심 청구인이 사망하는 바람에 사건이 종결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