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신영 경제부 차장

조국 사태가 한창 시끄러울 때 청와대 대변인은 한 라디오 방송에 나와 "대통령께서 '(국민에게) 알아듣기 쉽게 많이 설명해다오'란 얘기를 많이 하세요"라고 했다. '…다오'란 어미(語尾)가 참 이상하게 들렸다. 그 머릿속 대통령이 혹시 임금님인가 싶었다. 그로부터 한 달, 조국이 물러난 자리에 추미애 법무장관이 취임했다. 검찰 인사를 단행한 다음 보복성이란 논란이 일자 집권당 대표 출신인 추 장관은 이렇게 말했다. "검찰총장이 내 명을 거역했다." 이에 한 페이스북 친구가 올린 글이 흥미롭다. "'거역'은 상감마마에게 하는 거 아닌가?"

신년 기획 '진실의 수호자들' 취재를 위해 지난달 미국 전문가들을 만났다. 민주주의와 사실의 가치를 논하며 반복적으로 나오는 이야기가 있었다. '우리는 왕이 지겨워서 이 나라를 세웠기에'란 문구다. 뉴욕시립대 제러미 캐플런 교수는 "미 건국자들은 유럽에서 왕권이 얼마나 남용되는지를 많이 목격했다. 그래서 권력 분립과 사실을 토대로 한 언론의 견제 장치를 만드는 데 집착했다"고 말했다. 한국도 비슷한 이유로 권력 분립을 헌법의 근간으로 삼았다.

지난 3년을 돌아본다. 문재인 대통령과 운동권 586 집권 세력은 권력의 폭주를 견제할 제도를 여럿 고장 냈다. 제1 야당의 극렬한 반대에도 선거법을 유리하게 고치고 대법원·헌법재판소엔 입맛에 맞는 법관을 하나 둘 채워 넣었다. 대통령 측근을 건드린 검찰 인사들은 유배지(流配地) 수준인 한직으로 내몰았다. 대신 무소불위 수사권을 장착한 친정권 사정 기관(공수처)을 신설키로 했다. 21세기 권력 분립 국가가 맞나 싶을 정도로 거침이 없다. 이 와중에 이종걸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트위터에 쓴(논란 일자 삭제) 글은 조선시대를 연상케 한다. '형조판서가 입조했다. 의금부도사·포도대장은 이제 집포(緝捕·죄인을 잡는 일) 같은 원래 직분에 충실해야 할 것이다.' 민주당 홍익표 수석대변인은 검찰총장의 행태를 '엄히 다스려야 한다'는 성명을 9일 냈다. 사극(史劇) 대사 수준이다.

미국 프랭클린 D 루스벨트 대통령은 대공황 때 막대한 경기 부양책을 밀어붙이다 대법원에 저지당했다. 법원은 그의 '뉴딜' 정책 중 상당수가 위법하다고 판결하면서 이렇게 적었다. '이례적 상황에 이례적 해법이 필요할 수는 있다. 그러나 이례적 상황이 대통령에게 초(超)헌법적 권력까지 부여하진 않는다.' 화가 난 루스벨트는 대법원 물갈이를 추진했다. 이번엔 의회가 막았다. 여당이었던 민주당까지 상당수가 루스벨트에게 반대표를 던졌다. MIT 경제학과 대런 애스모글루 교수는 책 '국가는 왜 실패하는가'에 이 사례를 소개하면서 이렇게 적었다. '영국 정치 엘리트층은 법치주의를 중단하면 군주로부터 쟁취한 소득이 수포로 돌아갈 수 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미 의원들도 사법부의 독립성을 훼손할 경우 국가 체제에서 힘의 균형이 무너져 자신들도 무사하지 못할지 모른다는 사실을 잊지 않았다.' 지금 한국에 절대 권력을 방지할 이 정도 견제 장치가 남아는 있을까.

왕정을 완성하는 마지막 조각은 무조건 복종할 자세를 갖춘 맹목적 백성이다. 주말 서초동에선 아직까지도 '문재인 최고' '우리가 조국이다' 등을 외치는 집회가 열린다. 대통령 페이스북엔 '언제나 지지합니다' 같은 댓글이 수북하다. 청와대 게시판은 대통령 말을 어명(御命)처럼 여기는 극렬 지지층에게 장악당한 지 오래다. 간신 같은 586 운동권의 비호와 '묻지 마 지지자'들의 환호는 얼마나 달콤할까. 여기에 취한 대통령은 거역하는 이들을 하나씩 제거하며 왕 놀이를 즐기고 있는지 모른다. 그토록 싫어했다던 독재자를 닮아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