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혁건씨에게 복압조절장치는 “노래할 수 있게 도와주는 나만의 악기”다. 그는 “복압을 어느 정도 줄 때 어떤 세기로 목소리가 나는지 ‘조율’도 한다”고 했다.

“안녕하세요, 대통령님. 록그룹 ‘더 크로스’ 보컬 김혁건이라고 합니다. 보시다시피 저는 사지장애인입니다.”

지난해 11월 김혁건(39)씨는 문재인 대통령의 '국민과의 대화' 생중계 프로그램에 질문자로 등장했다. 3옥타브를 넘나들던 로커로만 그를 기억하던 사람들은 깜짝 놀랐다. 휠체어를 타고 있었고 팔다리를 움직이지 못했기 때문이다. 반면 민주평화통일 자문회의 위원으로 김씨를 아는 사람들은 이 행사를 '짜고 치는 고스톱'이라 의심했다. 지난달 4일 서울 성북구 한 스튜디오에서 그를 만났다.

죽고 싶어도 죽지 못해 살았다

2003년 발매된 더 크로스의 '돈 크라이(Don't cry)'와 '당신을 위하여'는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다. 지금도 2040 남성들의 노래방 스테디셀러로 꼽힌다. 이 사랑 노래를 부른 김혁건씨는 2012년 초봄, 오토바이를 타다 불법 유턴 차량과 충돌했다. 대수술 끝에 목숨은 건졌지만, 어깨 밑으론 움직이지 못하는 사지마비 장애 판정을 받았다.

―사고로 장애인이 된 뒤로는 소식을 듣기 어려웠습니다.

"사고 직후 1년은 말도 못 했어요. 발뒤꿈치, 엉덩이, 머리 뒤쪽까지 욕창이 생겨서 매일 썩은 부위를 도려내는 수술을 받았으니까요. 돌이켜보면 그때가 지옥이었습니다."

―괴로웠겠어요.

"다시 걷지 못한다면 죽어버리겠다는 생각밖에 없었어요. 그런데 혼자서는 죽지도 못하는 몸이잖아요. 온전히 고통을 받아들여야 했습니다."

―어떻게 그 마음을 추슬렀나요.

"몸을 찢고 줄기세포를 투입하는 수술을 여섯 번 받았어요. 30㎝ 대침을 수백 번 맞고, 벌집, 산삼부터 별별 걸 다 먹었는데도 소용없었죠. 다 포기하고 우울하게 누워 있는데, 저 때문에 망가진 부모님과 형, 누나의 삶이 보이기 시작했어요. 부모님은 매일 병원으로 출퇴근하며 저를 치료할 방법을 찾아다녔어요. 사지마비라는 현실을 제가 받아들여야 했습니다. 가족에게 행복을 돌려주고 싶었어요."

그는 집에서 영락없는 '막둥이'였다. 인터뷰를 도우러 온 아버지와 함께 사진을 찍어주겠다고 제안하자 "어머니가 질투하셔서 안 돼요"라며 웃었다.

―대통령과 대화에서 중증 장애인 문제를 질문했는데.

"장애인이 목소리를 내지 않으면 변하는 게 없다는 걸 알게 됐어요. 활동지원사를 구하기도 어렵지요. 저희는 수가 적으니까 국민청원 만 명을 넘기도 어려워요."

―민주평통 자문위원이라 '각본이 있던 것 아니냐'는 말도 나왔습니다.

"누구의 편을 떠나서, 중증장애인으로서 대통령에게 해야 할 말이 있어서 나갔습니다. 민주평통 자문위원은 남북한 장애인들이 문화예술 분야에서 교류하고 싶어 지원한 거예요."

기계로 '뱃심' 만들어 부르는 노래

장애 못지않은 고통이 따로 있었다. 삶의 낙이었던 노래를 잃었다는 것. 배에 힘을 줄 수가 없었다. 손과 팔이 움직이지 않으니 악기를 연주하지도 못했다.

―어떻게 다시 노래를 시작하게 됐나요.

"목청으로만 부르니 소리도 잘 들리지 않을 정도였어요. 소리 내는 연습부터 시작했어요."

―배를 눌러주며 노래를 돕는 '복압(腹壓) 조절장치'가 있다면서요.

"어느 날 아버지가 배를 눌러줬는데, 큰 소리가 나오더라고요. 노래할 수 있다는 희망을 봤죠. 서울대 로봇융합연구센터 방영봉 교수님이 제 사연을 듣고 기계를 개발해주셨어요."

위잉~. 김씨가 어깨의 힘으로 조이스틱을 움직였다. 휠체어에 장착한 기계가 배를 누르자 그는 숨을 들이마셨다.

―기계가 몸에 무리가 되진 않나요.

"깊이 들어갈 때는 경련이 와요. 배에 구멍을 뚫어 소변 줄을 넣은 상태인데 그쪽으로 출혈이 생기기도 해요. 처음에는 훨씬 깊게 들어갔어요. 지금은 12㎝까지 들어갈 수 있게 제한을 걸어놨어요."

―제한요?

"높은음이나 센소리를 내려면 배를 더 많이 눌러줘야 하거든요. 방 교수님은 '위험할 수 있다'며 기계를 개량할 때마다 점점 깊이를 줄여 오세요. 저는 고음이 점점 안 되니까 '조금만 늘려주세요, 교수님' 하고요(웃음)."

2006년 김혁건씨가 노래를 부르고 있다.

사람마다 행복의 무게 달라

김씨는 매주 한 번쯤 학교·군대나 행사에서 공연한다. 2018 평창 패럴림픽 개회식에선 휠체어 합창단과 함께 애국가를 불렀다. 그의 노래는 더 크로스 시절과는 완전히 다르다. 날카로운 고음 대신 성악 창법으로 부드럽게 노래한다. 자작곡 '넌 할 수 있어'를 자주 부른다.

―더 크로스 무대 영상에는 시원한 고음을 그리워하는 댓글이 아직도 달립니다.

"전 예전 노래를 찾아 듣지 않아요. 과거 영상에 달린 댓글도 보지 않고요. 노래를 들으면 그때 생각만 나니까요. 치료할 수 있는 장애가 아닙니다."

―비장애인으로 공연할 때와 비교하면 어떤가요.

"항상 마음이 아파요. 관객은 '더 크로스 왔다'며 기대했을 텐데, 제가 시원한 고음으로 '돈 크라이'를 불러주지 못하잖아요. 그래도 과거에 사로잡혀 있기보다 오늘 더 좋은 노래를 부르고 싶습니다."

―장애를 극복한 것 같습니다.

"전 극복하지 못했어요. 장애를 받아들이며 이겨나가는 과정이에요."

―외출하려고 휠체어에 한번 앉으려면 얼마나 시간이 걸리나요.

"오늘 오전 11시 인터뷰를 위해 8시부터 준비했습니다. 보호자가 제게 옷을 입히고 씻기고 휠체어에 앉혀 밥 먹고 나오는 것뿐인데도 그래요. 사고 전엔 5분이면 끝나던 양치질도 20분 넘게 걸리니까요."

―비장애인보다 하루가 짧겠네요.

"저는 매일 관장으로 대변 보는 데만 두 시간씩 써요. 병상에서 해야 할 게 너무 많아요. 아주 사소한 일이 생명을 위협하기도 하거든요."

―사소한 일요?

"저는 변비가 생기면 혈압이 올라서 죽을 수도 있어요. 음식을 씹을 때마다 어지러워서 밥 먹기도 힘들고요."

―시간과의 싸움이군요.

"하루에 자유롭게 쓸 수 있는 시간이 짧으니 너무도 소중해요. 일과를 마치고 누우면 '내일은 몇 시에 뭐 할까' 항상 머릿속으로 계획표를 만들어요. 오늘은 인터뷰 끝나고 치과 진료받고 맛있는 밥 먹고 들어갈 거예요(웃음). 저녁에는 함께 공연하는 소프라노 친구랑 연습하기로 했어요."

―이렇게 급변한 삶에서 노래는 어떤 의미인가요.

"두 발로 일어서지 못하지만, 계속 노래할 수 있다는 희망에 살아요. 내가 원하는 일에 도전하는 것, 그런 의지가 저를 지탱하는 힘이 되더라고요."

―죽지 못해 산다는 사람이 많은데.

"저도 그런 시절이 있었어요. 지금은 살아서 숨 쉬고 이렇게 말할 수 있어 행복해요. 입원 중일 때, 제 옆에 있던 형 어머니가 '아들 똥 냄새가 향기롭기만 하다'고 하셨어요. '똥은 아들이 살아 있다는 증거'라며 그분이 웃으시더라고요. 사람마다 행복의 무게가 다른 것 같아요."

―삶의 목표가 있나요.

"다치기 전에 하던 것, 다친 후엔 잃어버린 것을 하나씩 연습해 제 삶을 되찾고 싶어요. 요즘은 제 손으로 밥 먹는 연습을 합니다. 국은 다 흘리지만, 반찬은 찍어 먹을 수 있어요."

김씨는 이날 연주복에 나비 넥타이까지 매고 있었다. “사고 전에는 사계절 가죽 재킷만 입었다”며 그가 웃었다. “예전에 한 성악가 선생님이 ‘노래 전에 정갈하게 연주복을 입고 마음을 다지라’고 조언해주셨어요. 연주복은 지금 앞에 있는 사람들에게 최선을 다하겠다는 뜻이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