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후를 예감했어. 기억력이 사라지고 있었거든. 매번 무언가를 잃어버렸지. 처음에는 장갑이었는데 그 추위에는 정말 심각한 문제였네. 벗어놓은 걸 안 챙기고 그냥 출발했던 거야. 다음은 시계였어. 그다음엔 칼, 그다음엔 나침반. 쉴 때마다 나는 헐벗은 상태가 되어가고 있었지. 살길은 한 걸음을 내딛는 것이었어. 또 한 걸음. 언제나 똑같은 그 한 걸음을 내딛고 또 내디뎠지.
ㅡ생텍쥐페리 '인간의 대지' 중에서.
작가이자 항공 우편기 조종사였던 생텍쥐페리가 1939년에 발표한 '인간의 대지'에는 '나의 동료 앙리 기요메, 그대에게 이 책을 바친다'는 헌정사가 붙어 있다. 안데스산맥을 횡단하다가 추락, 영하 40도 혹한 속에서 극적으로 살아 돌아온 기요메를 중심으로 작가 자신과 동료들의 비행 경험을 소설 형식으로 담고 있다.
기요메는 배가 고프고 잠이 쏟아지고 살갗이 터지는 추위 속에서 걷고 또 걷는다. 아내와 동료들이 자신의 생존을 믿고 있을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살아서 구조될 때까지 죽을힘 다해 걸으리라, 그렇게 믿고 있는 사람들의 희망을 배신하지 않겠다고 그는 생각했다. 몇 시간도 못 버티고 동사했을 거라며 닷새 만에 구조 작업은 중단됐지만 7일째 되는 날 그는 기적처럼 동료들 앞에 나타난다.
사람들에 대한 책임, 조종사라는 직업인으로서 책임, 무엇보다 자기 자신에 대한 책임을 다한 것이 기요메의 위대함이라고, 인간은 장애와 맞서 싸울 때 진정한 자신을 발견하는 법이라고, 그런 정신이야말로 진흙으로 만들어진 인간을 인간답게 창조해내는 것이라고 작가는 말하고 있다.
“폭풍우와 안개, 눈 때문에 힘들 때가 있을 거야. 그럴 때면 자네보다 먼저 그 일을 겪은 사람들을 떠올리게. 그리고 생각하는 거지. 그들이 이겨냈다면 나도 이겨낼 수 있다고.” 불시착으로 여러 번 생사 위기에 놓였던 생텍쥐페리는 그때마다 기요메의 조언을 떠올리고 힘을 냈을 것이다. 세상에 나만 겪는 고통이란 없을지 모른다. 겁내지 말고 앞으로 나아가면 된다. 장갑이 없어도 한 걸음, 나침반이 없어도 한 걸음. 그렇게 담담한 발걸음으로 2020년의 첫 아침을 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