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한국 문화계에는 웃고, 울고, 화내고, 기뻐할 일이 이어졌다. 새로운 복고를 의미하는 '뉴트로'의 인기가 '미스 트롯'과 '촌므파탈'(촌스러움과 치명적 매력남을 뜻하는 옴므파탈의 합성어)로 이어지면서 서민들 팍팍한 삶에 웃음을 줬다. 연말엔 당돌한 펭귄 캐릭터 '펭수'가 이 자리를 독차지해 사랑받았다. 한국 미술품으로 경매 최고가를 기록한 김환기의 '우주'와 세계 무대에서 활약한 방탄소년단도 자부심을 안겼다. 웃을 일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조국 사태에 대한 분노는 문화계에도 번져 '386세대'에게 '공정'을 요구하는 '밀레니얼' 세대가 화두로 등장했다. 아이돌 경연 대회인 '프로듀스' 시리즈가 조작됐다는 게 밝혀져 큰 실망을 안겼고, '버닝썬 게이트'로 대형 연예기획사 YG가 추락했다. 악플에 시달리던 연예인들이 목숨을 끊어 경종을 울렸다. 올 한 해의 '희로애락'은 맵디매운 마라(麻辣)로 풀고, 다디단 흑당(黑糖)에 위로받았다. 10개 키워드로 올 한 해 문화계를 결산했다.

1. 트로트 - 미스 트롯'으로 전국이 들썩!

TV조선 예능 '미스 트롯'에서 시작된 트로트 열풍이 대한민국을 휩쓸었다. 지난 2월 숨어 있던 실력파 트로트 가수들을 한자리에 불러 모은 '미스 트롯'이 종편 예능 역사상 최고 시청률인 18.1%를 기록하며 남녀노소 모두에게 사랑받았다.

구성진 정통 트로트 창법으로 우승을 거머쥔 가수 송가인은 콘서트를 전 석 매진시키고 각종 TV 프로그램 섭외 1순위로 떠올랐다. 송가인뿐만 아니라 홍자, 정미애, 숙행 등 무명이었던 가수들도 '미스 트롯'을 통해 세상에 이름을 알렸다.

지상파도 TV조선을 따라 트로트 가수 발굴에 나섰다. 유재석은 MBC 예능 '놀면 뭐하니?'에서 트로트 가수 유산슬로 데뷔하며 트로트 열풍에 합류했다. KBS '트로트가 좋아'에서 우승한 조명섭은 '남자 송가인'으로 불리며 스타덤에 올랐다. '미스 트롯'의 전설을 이어갈 TV조선 '미스터 트롯'이 2020년 1월 2일 첫 방송 한다.

2. 뉴트로 - 경험해보지 못한 낡음에 퐁당

2010년 말 '쎄시봉'으로 시작한 복고 바람이 '90년대' 향수로 정점을 찍었다. 복고이되, 옛것을 새롭게 해석해 '뉴트로(new+retro)'다. 젊은 세대에겐 복고가 향수가 아닌 새로운 문화 경험으로 파고들었다.

SBS와 KBS가 각각 1990년대에 방영한 '인기가요'와 '가요톱10'을 유튜브에 스트리밍하는 채널이 인기를 얻으면서 '온라인 탑골공원'으로 불렸다. 핑클, H.O.T 등 90년대 가수들이 다시 주목받았고, '탑골 GD'로 불리는 양준일은 20여년 만에 연예계에 복귀했다. 과거 모습을 재현한 '복각판' 상품들도 앞다퉈 출시됐다. 영롱한 파란색 병에 두꺼비가 그려진 '진로이즈백'은 출시 7개월 만에 1억 병 판매를 돌파했고, 과자 '별뽀빠이', 아이스크림 '구구' 등이 옛날 옷으로 갈아입고 다시 시장에 나왔다. 20~30대들이 서울 을지로의 숨겨진 노포를 찾아다니며 '힙지로'가 맛의 성지가 됐다.

3. 촌므파탈 - 촌스러워서 사랑스러워

"나 황용식이 사랑은 신중보다 전념이 중요허유."

촌스럽고, 사랑에 저돌적인 '직진남'이 이상형으로 등극했다. 어촌 옹산을 배경으로 로맨스와 스릴러를 넘나든 KBS 드라마 '동백꽃 필 무렵' 시청률이 20%를 훌쩍 넘었다. 경찰 황용식(강하늘)은 구수한 충청 사투리로 동백이(공효진)에게 끈질기게 사랑을 고백했다. "동백씨 저랑 제대로 연애하면유, 진짜로 죽어유. 매일 사는 게 좋아가지고 죽게 할 수 있다고유."

영화 '타짜: 원아이드잭'이 개봉하면서 '타짜'(2006)의 곽철용(김응수)이 소환됐다. 곽철용의 대사는 패러디를 양산했다. 그는 "화란아 나도 순정이 있다. 네가 그런 식으로 내 순정을 짓밟으면은 인마! 그때는 깡패가 되는 거야"라고 무식하게 고백하는가 하면 "묻고 더블로 가"라며 돌진한다. 이리저리 재면서 간만 보는 부박한 사랑에 '촌므파탈'은 신선한 자극이자 희망이었다.

4. 공정 사회 - 밀레니얼 세대와 386 책임론

출판계 화두는 '세대 갈등'과 '공정 사회'였다. '밀레니얼'로 통칭되는 90년대생이 주목받고, 경기 둔화 및 저성장에 대한 386(현 586) 세대 책임론이 등장하면서다.

'386 책임론'의 포문을 연 책 '386 세대 유감'(웅진지식하우스)이 대표적. 7월 출간돼 7000부 팔렸다. 의외로 책이 중점적으로 비판하는 대상인 50대 남성이 가장 많이 샀고, 40대 여성이 그 뒤를 이었다.

조국 전 법무장관의 자녀 입시 특혜 의혹에 대한 분노는 공정 사회에 대한 관심을 불러일으켰다. 리처드 리브스 브루킹스연구소 선임연구원이 상위 20% 상류층의 독식을 비판한 '20 vs 80의 사회'(민음사) 는 8월에 나와 약 1만 부 팔렸다. 남성 독자가 61%, 40대 독자가 36%였다. 컬럼비아대 사회학과 교수인 셰이머스 라만 칸의 '특권'(후마니타스), 이철승 서강대 교수가 쓴 '불평등의 세대'(문학과 지성사)'도 주목받았다.

5. 펭수 - 선 넘으니 통쾌하네!

'저래도 되나' 싶을 만큼 위험 수위를 넘나들며 할 말 다하는 캐릭터가 사랑받은 한 해였다. 지난 3월 EBS 유튜브 채널 '자이언트 펭TV'로 데뷔한 거대 펭귄 '펭수'는 교육 방송에선 보기 어려운 '선 넘는 발언'으로 인기를 끌었다. "EBS에서 잘리면 KBS로 가겠다"며 제작진을 협박하고, 걸핏하면 회사 사장 이름인 '김명중'을 들먹인다. 펭수의 어록과 사진, 자작곡 등이 담긴 다이어리는 예약 판매 1분 만에 200만 부가 팔렸다. '자이언트 펭 TV'는 최근 구독자 수 150만명을 돌파했다.

여러 직업을 체험해보는 유튜브 채널 '워크맨'의 방송인 장성규는 별명부터가 '선넘규'(선을 넘는 장성규)다. 피자 배달을 하다가 농땡이 치는 건 기본, 손님에게도 막말에 가까운 농담을 던지며 웃음을 안겼다. 유튜브 구독자 수는 350만명을 넘겼다. 사석에서나 나올 법한 특유의 아슬아슬한 유머 코드로 각종 지상파 방송에도 진출했다.

6. 방탄소년단 웸블리 찍고 사우디까지

올해도 방탄소년단(BTS)의 해였다.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세계 음악 시장의 각종 기록을 갈아치우며 올해는 '기록소년단'이란 별명을 얻었다.

지난해 시작한 '러브 유어셀프' 월드 투어로 BTS는 전 세계 13국, 24도시에서 콘서트를 열었다. 이들이 만난 팬(아미·ARMY)만 206만명. 지난 6월엔 마이클 잭슨, 마돈나, 퀸이 공연한 영국 웸블리 스타디움에 섰고, 10월엔 가장 보수적인 이슬람 국가 사우디아라비아의 수도 리야드의 킹파드 스타디움에서 팬들을 만났다. 한국 가수가 웸블리, 킹파드 무대에서 공연한 건 BTS가 최초다.

BTS가 지난 4월 발매한 앨범 '맵 오브 더 솔(MAP OF THE SOUL)'은 세계 음원 차트와 시상식을 휩쓸었다. 미국 인기 가수 할시가 참여한 타이틀 곡 '작은 것들을 위한 시'는 빌보드 차트에서도 주요 차트인 핫 100에서 8위에 올랐다. 한국 가수로는 가장 높은 기록이다. 앨범 차트인 빌보드 200에선 1위를 차지했다.

7. CJ의 명암 - 영화는 대박, '프듀'는 뒤통수

15년간 지켜 온 업계 1위 자리를 내주고 3위로 밀려났던 CJ엔터테인먼트가 화려하게 돌아왔다. 올해 극장가는 CJ 영화의 압승이었다. 올 초 개봉한 '극한직업'(감독 이병헌)은 관객 1600만명을 넘겨 역대 한국 영화 흥행 2위를 기록했다. 코미디 영화로는 이례적 성공이다. 칸 영화제 황금종려상을 탄 봉준호의 '기생충'은 천만 관객을 넘긴 뒤 오스카상까지 넘보고 있다. 여름 성수기엔 '엑시트'(감독 이상근)가 940만 관객을 모았고, 추석 대목엔 '나쁜 녀석들: 더 무비'(감독 손용호)가 선전했다.

문제는 CJ 산하 음악 전문 채널 엠넷에서 터졌다. 서바이벌 경연 '프로듀스' 시리즈 투표 조작 의혹이 불거진 것. 경찰 수사에 따르면 프로그램 담당 PD가 기획사들로부터 수백만원어치 접대를 수십 차례 받은 것으로 드러났다. 담당 PD와 총괄 프로듀서(CP)는 업무 방해·사기·배임 수재 등의 혐의로 구속됐다. 현재 경찰은 CJ 고위 간부가 관련됐을 가능성도 수사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8. 악플 - 악성 댓글이 불러온 비극

설리, 구하라 등 악성 댓글에 시달리던 일부 연예인이 극단적 선택을 했다. 걸 그룹 에프엑스 출신 가수 겸 배우 설리는 2014년 남자 친구와 공개 연애를 시작한 뒤부터 각종 성(性)희롱성 댓글과 루머에 시달리다 지난 10월 끝내 유명을 달리했다. 설리의 친구였던 구하라도 그로부터 40여일 만에 숨진 채 발견됐다. 지난해 전 남자 친구가 찍은 불법 촬영물을 둘러싸고 갈등이 불거지면서 네티즌들의 구설에 올랐다

두 사람의 죽음은 악성 댓글을 무분별하게 노출하는 온라인 댓글 시스템에 경종을 울렸다. 인터넷 포털 댓글 폐지 여론이 불붙었고, 카카오는 연예 뉴스에서 댓글을 없애기로 했다. 카카오는내년 2월부터는 이른바 '실검'이라 불리는 실시간 검색어도 폐지한다. 인물을 검색할 때 연관 단어를 보여주는 관련 검색어 서비스도 중단한다. 네이버는 인공지능 기술을 기반으로 댓글상 욕설 노출을 줄인다는 방침이다.

9. 김환기 - 132억… 한국 미술품 경매 최고가

화가 김환기(1913~1974)가 한국 미술품 낙찰가 최고 기록을 새로 썼다. 말년에 그린 1971년작 '우주'(Universe 5-IV-71 #200)가 지난달 23일 홍콩 크리스티 경매에서 8800만홍콩달러(약 132억원)에 낙찰됐다. 한국 미술품 가격이 경매 시장에서 100억원을 넘긴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푸른색 전면점화 '우주'는 김환기의 유일한 두폭화(畵)이자 가로·세로 254×254㎝ 최대 규모로, 40년 만에 처음 경매 시장에 나와 신기록의 주인공이 됐다.

반면 국내 미술 시장 분위기는 암울했다. 경기 침체로 '큰손'이 지갑을 닫으면서 찬바람이 불었고, 개인의 미술품 판매 수익에 대한 세무 당국의 과세 강화 검토 소식까지 덮치며 크게 휘청였다. 화랑가 침체는 그림 표구사 폐업 등 도미노 현상까지 낳았다. 예술경영지원센터 측은 "국내 경매 시장 낙찰가 총액은 전년 대비 25% 정도 하락할 것으로 예상된다"고 했다.

10. 맵단 - 마라로 때리고 흑당으로 달래

올해의 맛은 '맵단'(맵고 달다)이었다. 중국 쓰촨 지방의 향신료 마라가 올해 요식업계를 달궜다. 저릴 마(麻), 매울 랄(辣)을 써서 혀가 마비될 정도로 맵고 얼얼하다는 뜻. 미각과 통각의 경계에 있는 '마라 맛'으로 스트레스를 푸는 젊은 층이 늘자 골목골목 마라탕 가게가 들어섰다.

고기·채소·버섯·해산물 등을 마라 소스에 볶은 마라샹궈, 끓는 마라 육수에 각종 재료를 담가 익혀 먹는 훠궈(火鍋)도 익숙한 외식 메뉴로 자리 잡았다. 마라로 마비된 혀는 다디단 흑당 음료로 달래줬다.

2017년 대만에서 유행하기 시작한 흑당 음료가 올여름 한국에 상륙해 '인싸템'(인사이더 아이템)으로 떠올랐다. 흑당에 졸인 타피오카 펄, 흑당 시럽, 우유와 크림이 들어간 '흑당 버블티' 전문 업체를 비롯해 일반 카페에서도 너나 할 것 없이 흑당이 들어간 음료를 메뉴에 넣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