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초 '저 청소일 하는데요?'라는 책을 낸 30대 초반의 작가 김예지씨. 대학에서 미술을 전공하고 디자인 회사에서 인턴을 하기도 했지만, 취업이 잘 안 돼 생계를 위해 결국 빌딩 청소일에 뛰어들었다. 젊은 대졸자가 4년간 청소일을 하면서 온몸으로 느낀 세상의 편견 등을 담담하게 풀어 썼다. 그는 책 출간 후 한 인터뷰에서 "그림으로 생계를 꾸릴 수 있게 되면 청소일은 그만둘 것"이라고 말했다.
산후도우미 일을 하는 배모(64)씨도 여대를 나온 고학력자다. 그는 "'내가 이런 일 할 사람은 아닌데…'하는 생각이 자주 들지만, 이 나이에 번듯한 정규직 일자리를 구하기란 어려운 일이기 때문에 도우미 업체에서 짬짬이 오는 '콜'을 받으면 거르지 않고 달려나간다"고 했다.
우리나라 대졸 취업자 가운데 굳이 대학 졸업장이 필요하지 않은 서비스·판매직, 단순 노무직 같은 일자리에 '하향 취업'한 사람이 약 30%라는 한국은행의 연구 결과가 나왔다. 대졸자 수는 급증하는데 경제성장이 더뎌 그만한 일자리는 많이 만들어지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넘쳐나는 대졸자, 못 따라잡는 '대졸 일자리'
한국은행 오삼일 과장과 강달현 조사역은 22일 '하향 취업의 현황과 특징' 보고서에서 하향취업률(대졸 취업자 수 대비 하향취업자 수)이 2000년대 들어 꾸준히 증가하면서 최근엔 30%대로 높아졌다고 밝혔다.
하향 취업이란 취업자의 학력이 일자리가 요구하는 학력보다 높은 경우를 말한다. 연구진은 4년제 대학을 나온 취업자가 통계청의 한국표준직업분류상 관리자나 전문가, 사무 종사자로 취업하면 '적정 취업'으로 분류하고, 그 외 서비스 및 판매 종사자, 농림어업 숙련 종사자, 단순노무 종사자 등의 직업을 가지면 '하향 취업'으로 분류했다.
분석을 시작한 2000년만 해도 하향취업률은 23.6% 정도였다. 대졸 취업자 663만명에 적정 일자리가 631만개로 비교적 충분했던 덕분이다. 그러나 2019년 9월 기준 하향취업률은 30.5%로 30%를 넘어섰다. 올해 기준 대졸 적정 일자리는 1080만개였는데 대졸자는 1512만명에 달했기 때문이다.
하향취업률은 경기가 나쁠수록 급격히 뛰는 경향도 관찰됐다. 2009년 글로벌 금융 위기 당시 하향취업률이 큰 폭으로 증가했고 이후 증가세는 더 가팔라지는 모습이다. 경기가 나빠지면 일단 실업률이 늘고, 일자리가 부족해지면 사람들이 양질의 일자리 따질 것 없이 일단 취업하고 보자는 경향이 강해지기 때문이다.
연구팀은 "2000~2018년 중 대졸자는 연평균 4.3% 증가했지만 적정 일자리는 2.8% 증가하는 데 그쳤다"며 "경기 탓도 있지만, 대졸자를 너무 많이 배출하는 우리나라 교육 구조도 문제"라고 지적했다.
◇한 번 하향 취업하면 사다리 끊겨
하향취업률은 전공별로 큰 차이가 있었다. 의사, 약사, 교사 등을 배출하는 의약·사범계열 전공자들의 하향취업률은 10% 이내로 낮았지만, 공학(27%), 인문사회(27.7%), 예체능(29.6%), 자연계열(30.6%) 등은 상대적으로 높았다. 하향 취업자의 평균 임금(2004~2018년 기준)은 월 177만원으로 적정 취업자의 평균 임금(284만원)보다 38% 적었다.
문제는 일단 급한 김에 하향 취업을 했는데 이후 적정 취업으로 전환되는 비율이 얼마인가, 이른바 '일자리 사다리'가 원활히 작동되느냐는 것이다. 연구팀은 하향 취업자가 1년 뒤 하향 취업에서 벗어나 적정 직업을 찾은 경우는 4.6%에 불과했고 하향 취업을 유지한 경우가 85.6%로 훨씬 많았다고 분석했다. 아예 취업 전선을 떠난 경우도 9.8%였다. 3년 뒤에도 하향 취업을 유지한 경우가 76.1%, 적정 취업으로 전환한 경우는 11.1%에 그쳤다. 미국의 경우 하향취업률이 우리보다 높은 40% 수준이지만 1년 이내 적정 취업자로 전환되는 비율이 30% 가까이 되는 것과 비교할 때 우리나라의 하향 취업 고착화 현상이 더 심했다.
연구팀은 "하향 취업이 늘어난다는 것은 인적 자본 활용이 비효율적이라는 뜻이고, 경제 전체로 보면 생산성 둔화를 초래한다"며 "필요 이상의 고학력화 현상을 완화하는 동시에 하향 취업에 따른 낙인 효과를 줄이기 위해 노동시장 제도 개선을 통해 직업 간 원활한 노동 이동을 유도해야 할 것"이라고 지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