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장호 영화감독, 인터뷰

흥행 영화감독이 될 수밖에 없는 운명을 타고난 감독이 있다.

영화가 흔하지 않던 시절 미군정 시절 영화 검열관인 아버지를 따라 수도 없는 해외 영화를 보며 영화와 친근해졌고, 초중고 동창 친구가 쓴 신문소설이 엄청난 인기를 얻자 친구에게 그 판권을 얻어 데뷔작부터 초대박 흥행을 한 이장호가 그 중 한 명이다.

이 감독은 1974년 데뷔작 '별들의 고향'을 시작으로, '바람불어 좋은 날', '어둠의 자식들', '낮은 데로 임하소서', '바보선언', '무릎과 무릎 사이', '이장호의 외인구단 등 다양한 장르의 작품을 흥행시킨 80년대 대표 감독이다.

원로 감독 이장호에게 한국 영화의 미래를 듣는다.◇영화 검열관 아버지 따라다니며 영화와 인연

"아버지가 영화 검열할 때 나를 데리고 다녔다. 아버지 무릎에 앉아서 영화를 봤다. 내용도, 제목도 모르고 화면만 봤다. 수없이 많은 영상들이 내 안에 스며들었을 것이다. 한 가지 떠오르는 화면은 유치한 SF 영화의 장면이다. 화성인이었는데 동그란 얼굴에 문어 다리를 하고 나오는 장면이 떠오른다."

이 감독의 아버지는 이 감독이 영화에 친숙해질 수 있도록 도왔을 뿐만 아니라, 공부에 소질이 없던 이 감독에게 영화 감독으로의 길을 직접 제시하기도 했다. 이 감독은 아버지의 말을 듣는 그 길로 홍익대 미술대를 중퇴하고, 신상옥 감독의 신필름에 입사한다.

"유소년 시절부터 학교 공부에 매력을 못 느꼈다. 불량한 성적으로 학교를 다녔고, 매일 술을 마시고 집에도 안 들어가고 그랬다. 하루는 아버지가 '너는 공부해서 성공할 애가 아니다. 등록금이 아까우니 학교 관두고 영화판에 들어가라'고 하셨다."
당시 신필름은 한국에서 최고 규모의 영화 제작사였다. 당시의 영화 제작 환경은 현재보다 훨씬 열악했다. 이 감독은 그 때문에 당시 영화 제작에 뛰어드는 이들도 많지 않았고, 이탈률 또한 높아 입사가 어렵지 않았다고 회상했다.

이 감독은 "거기에 8년 있었다. 걸레질, 망치질 등 잡일은 다했다. 내가 살면서 제일 고생했던 시기다. 영화판을 따라다니다 보니 주거 부청처럼 돼서 군대를 못 갔는데, 나중에 드는 생각이 '군대보다 더 힘든 연출부 일을 했었구나' 하는 거였다. 군대는 나중에 입영 면제 나이가 돼서 못 갔다"라며 연출부 당시의 어려움을 말했다.

이어 "사극 찍을 때가 특히 힘들었다. 엑스트라가 많은 날에는 대나무 궤짝 안에 (밤새) 의상 소품을 수없이 실어야 한다. 그리고 나서 통행금지가 풀리면 트럭에 올려야 했다. 고급 스태프들은 관광버스로 이동할 때, 조수들은 트럭에서 짐짝들과 같이 가야 했다"라고 당시의 어려움을 밝혔다.

◇입봉과 동시에 이룬 성공…'별들의 고향'
그의 입봉작 영화 '별들의 고향'의 원작자는 소설가 최인호다. 그는 이 감독과 초중고 동창이다. 이 감독은 학교에 다니던 시절부터 최인호의 능력을 알아보고 그를 눈여겨봤다고 고백했다.

"초등학교 때 백일장에서 장원 받는 걸 여러 번 봤다. 얼마나 대단하냐면 고등학교 2학년 때 한국일보 신춘문예에 가작(매우 뛰어난 작품) 당선이 됐다. 고등학생이라 당선작으로는 선정 안 하고 가작을 줬다고 하더라. 걔 작품은 읽을 때마다 감탄스러웠다. 20대일 때, 인호가 어느날부터 신문에 소설을 연재하게 됐다. 그 당시에는 나이가 50대나 돼야 신문소설을 맡을 수 있었다. 근데 이게 연재하자마자 대박이 났고, 이게 바로 '별들의 고향'이다."

이 감독은 최인호와의 깊은 인연으로 '별들의 고향' 판권을 비교적 쉽게 손에 넣을 수 있었다. 이 감독은 "경쟁이 심했는데 판권을 내가 갖게 되니까, 영화사들이 나한테 붙더라. 제작자들이 달려드니까 나는 쉽게 선택할 수 있었다"라고 회상했다.

1974년 개봉한 '별들의 고향'은 단일극장 시대에 46만명을 극장으로 들였다. 이 기록은 현재의 천만 영화에 비견될 만큼 놀라운 흥행 성과다.
그러면서도 이 감독은 '별들의 고향'을 자신에게 애증의 작품이라고 일컬었다.

이 감독은 "사회적 경험이 별로 없는 상태에서 문학에 의해서만 정신이 성숙한 상태였다. 그래서 그냥 감각적으로 만든 게 '별들의 고향'이었다. 근데 이게 뜻밖에 성공을 하니 나는 당시 아주 위험한 상태였다. 성공에 비해 역량이 부족했으니까"라면서, "나중에는 이 작품이 싫증이 나더라. 이 자식('별들의 고향')이 계속 나를 따라다니며 나를 대변하고 상징하는 느낌이라 사실 애정이 안 간다"라고 못 박았다.

◇시련과 그 회복, 그후 한국영화의 중심으로

이 감독은 영화 '별들의 고향' 이후 4편의 영화를 제작한 후 대마초 파동에 휘말려 3~4년 간 활동이 정지된다. 그는 이 시기에 크게 좌절했지만, 이를 전화위복의 기회로 삼아 내면적으로 성숙했다.

"대마초 사건에 걸려 무기한 활동정지를 먹었다. 당시 그 시련을 겪을 때, 눈이 뜨이며 안 읽던 책들을 읽게 됐다. 근대사, 민중문학, 운동권 책 등을 많이 봤다. 그러고 나니 영화를 다르게 만들어야겠다는 생각이 들더라. 리얼리즘을 회복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당시에는 남한이 북한보다 못 살던 시절이라 실제 한국영화 현실을 그린 작품이 없었다. '별들의 고향'도 그런 아류에 들어간다."
그렇게 해서 그는 1980년 해금 후 '바람불어 좋은 날'을 탄생시킨다. 이 감독은 "사실 속으로는 제일 좋아하는 게 이 작품"이라며 "오죽하면 제2의 데뷔작이라고 할 정도"라며 웃었다.

'바람불어 좋은 날'은 이 감독이 언급한대로 '사회적 리얼리즘' 계열의 영화로서, 최일남의 '우리들의 넝쿨'을 각색해 발표한 작품이다. 이 작품은 한창 개발이 진행 중인 서울 변두리 지역을 배경으로 세 청년의 생활을 유머러스하게 보여준다.

이 감독이 '바람불어 좋은 날'을 준비했던 기간은 10·26사태(박정희 서거)와 5·17군사정변(전두환의 쿠데타)사이였다. 덕분에 이 감독은 이 시기 시골 청년의 상경기를 통해 여러 군상의 세태를 풍자적으로 담아냈다.

사회적 문제의식의 표현이 제한되던 시절, 산업화 시대 빈민들의 초상과 그 속에 도사린 구조적 모순, 계급의 문제를 건드린 것 자체가 사회적 저항으로 간주됐다.

이렇게 이 감독의 '바람불어 좋은 날'은 1980년대 한국영화 리얼리즘 바람을 선도한다.

◇한국영화의 미래는 독립영화에서 찾아야
그는 올해 한국영화100주년기념사업회에서 위원장을 맡아 한국영화의 100주년을 기념하는 데 누구보다 앞장섰다. 그만큼 한국 영화의 과거와 현재, 미래에 관해 많은 고민과 혜안을 견지하고 있었다.

그는 한국영화의 성장이 자신의 파란만장한 인생 같다고 회고했다.

"한국영화는 식민지 때 가난하게 시작했다. 그 다음에도 어려움이 얼마나 많았나. 해방이 되자, 이념 전쟁이 일어나고 전쟁이 났다. 전쟁 후에는 복구하느라 가난했다. 그때조차도 영화는 계속 만들어졌다. 낡은 기자재로 영화를 만드는데, 촬영을 하면 욕이 나오기 일쑤였다. 카메라가 멈추면 촬영부는 방법이 없으니 배터리를 때린다. 그러면 접선이 되서 다시 카메라가 되고는 했다. 나는 오히려 이러한(어려움 속에서) 한국 영화의 유전인자가 생겼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이 감독은 한국영화가 현재 가난으로부터 나온 한국영화만의 유전인자를 잃은지 오래이며, 자본이 한국영화를 좀먹고 있다고 짚었다. 이 감독은 "한국영화의 발전을 막던 요소 중 하나가 검열이다. 지금은 검열이 완화됐지만 대신 자본 논리로 영화가 돌아간다. 이것이 우리를 변질시키고 있다. 현재의 한국영화들은 재밌고 할리우드 영화 뺨칠 정도다. 근데 영혼이 죽어있다. 이게 검열보다 더 무서운 독소"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한국영화의 미래는 한국영화의 유전인자를 지닌 독립영화에서 찾을 수 있다고 강조했다.

"대한민국 유전인자를 그대로 갖고 있는 독립영화가 순수한 한국영화라고 생각한다. 독립영화가 나중에는 틀림없이 효자 노릇을 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한국영화도 지금 전성기처럼 보이지만, 언젠가 도산될 것 같다. 그 후 명맥을 유지하는 건 독립영화일 것이다."

2011년작 '산책', 2013년작 '시선' 이후 작품을 내놓지 않고 있는 이 감독은 다음 작품으로 고 신성일 배우의 유작 '소확행'을 이어 받아 연출할 계획이다. 그는 "시나리오를 전면 수정해야 하는데, 금년에는 영화 100주년을 준비한다고 시간이 없었다. 23일부터 '방콕'하며 작업을 하려고 지방에 거처를 마련해 뒀다. 내년이나 내후년에 볼 수 있을 것"이라고 자신했다.

영화 인생 46년, 여전히 영화를 만들고픈 이장호. 그의 은퇴는 아직 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