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한(駐韓) 중국 대사관이 최근 한국의 전·현직 국회의원과 고위 관료, 기업인, 언론인 등 자신들이 고른 '우호 인사' 100여명에게 "5일 왕이(王毅) 중국 외교담당 국무위원 겸 외교부장의 오찬 행사가 있다"며 급하게 참석을 요청한 것으로 3일 확인됐다.

이 작업은 지난주 후반쯤 시작됐지만 일부 인사는 왕 부장 방한 전날이자 오찬 행사 이틀 전인 이날 "바쁘더라도 참석해달라"는 '초청 아닌 초청' 메시지를 받고 당혹감을 감추지 못한 것으로 알려졌다. 전직 외교부 차관은 "일개 장관이 방한을 코앞에 두고 한국 오피니언 리더들에게 '내가 서울에 가니 점심시간을 비우라'는 식으로 통보한 것은 한국을 무시한 처사"라고 했다.

주한 중국 대사관은 최근 한국 정·관·재계 주요 인사들에게 "5일 오후 12시 왕이 부장이 ○○ 호텔에서 친선 오찬회를 마련하고 우호 인사 100명을 초청한다"는 사실을 알렸다. 한 기업 대표의 비서는 "지난주 중국 대사관에서 전화를 걸어와 당장 다음 주 오찬 행사가 있으니 참석해달라는 요청을 했다"며 "이미 잡아놓은 대표님의 한 달치 오찬 일정을 변경해야 해 난감했다"고 했다. 특히 중국과 사업 관계가 있는 기업인들은 중국 대사관의 갑작스러운 오찬 초청을 '선택'이 아닌 '의무'로 느껴 마음고생을 했다고 한다.

왕이(왼쪽) 중국 외교부장이 2017년 12월 14일 베이징 인민대회당 북대청을 찾은 문재인 대통령의 팔을 툭툭 치며 말을 거는 모습. 왕 부장이 문 대통령을 만만하게 보는 것 아니냐는 비난 등 외교 결례 논란이 일었다.

외교 소식통은 "중국 정부는 왕 부장의 방한 여부도 한국 정부에 임박해서 알려줬다"며 "외교부장의 오찬에 한국 주요 인사 100명을 사나흘 만에 소집하겠다는 발상 자체가 한국을 하대하는 시각을 보여준다"고 했다. 그는 "중국 측이 의도했든 안 했든 모욕적인 줄 세우기로 비칠 수 있다"고 했다.

미국의 경우 국무장관은 물론 대통령도 한국 주요 인사 100명을 사나흘 만에 '긴급 소집'해 행사를 벌인 사례는 없는 것으로 파악됐다. 중국 대사관 관계자는 "왕이 부장 방한이 최근에야 확정되면서 실무진에서 급하게 (오찬) 행사를 준비하게 된 것"이라고 했다. 외교 일정상 부득이한 측면이 있으니 이해해 달라는 취지였다.

외교가에선 왕 부장의 '100명 오찬 소집'을 놓고 "2010년 중국 다이빙궈(戴秉國) 당시 외교 담당 국무위원의 방한을 연상케 한다"는 말이 나왔다. 다이빙궈 일행은 2010년 11월 연평도 포격 직후 1박 2일 일정으로 방한했다. 한·미의 서해 연합훈련을 하루 앞둔 날이었다. 다이빙궈 일행은 11월 27일 오후 3시 "한국에 갈 테니 서울공항을 비워 달라"고 통보하고 15분 뒤 중국 공항을 이륙했다. 도착 직후엔 이명박 당시 대통령과 면담을 요구했다. 다음 날 이 대통령을 만난 다이빙궈는 한 시간 동안 역사 등 현안과 무관한 이야기를 한참 하다가 불쑥 북핵 6자 회담 재개를 제안해 논란을 빚었다.

왕 부장은 4일 방한해 카운터파트인 강경화 외교부 장관과 회담하고 5일 문재인 대통령을 예방한다. 왕 부장은 강 장관, 문 대통령과 시진핑(習近平) 중국 국가주석의 방한 문제 등을 협의하고 사드(THAAD·고고도 미사일 방어체계) 문제도 거론할 것으로 보인다.

한편 중국 영자 매체인 글로벌타임스는 이날 '한국이 외교 딜레마를 벗어나려면 중국과 협력을 최우선으로 해야 한다'는 취지의 한국 학자 기고문을 게재했다. 기고문은 "최근 한국은 사방에서 외교관계가 포위돼 있다"며 미국의 인도·태평양 전략 동참 문제, 주한 미군 방위비 분담금 문제 등을 거론했다. 그러면서 미국의 일방주의로 동맹의 개념이 흔들리고, 미국이 현재와 같은 외교정책을 고수할 경우 미국의 동맹으로서 한국의 어려움은 더욱 커질 것이라고 했다.